‘삶의 길목에서’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본다. 띠별로 출생 연도에 한마디씩 풀어 놓은 말이 재미있다. 신문을 대충 훑어보고 청소며 빨래를 몰아쳐서 한다. 집 떠나있는 아들이 오는 날이다. 월화수목은 느긋하게 살다가 주말만 되면 살림하는 주부가 된다.

세탁소에 들렀다. 서너 해 보아왔건만 아주머니는 처음 본 듯 늘 데면데면하다. 하긴 살갑게 대하는 거보다 편할 때도 있다. 아주머니가 옷을 내주면서 웬일로 말을 건넨다. “화장 안 해도 얼굴이 깨끗하셔요.” 집 나서려면 군빗질에 립스틱 정도는 바르는데 민낯으로 보였나. 그래도 아주머니 말이 싫지는 않다. “사장님은 더 고우셔요.” 말 대접을 한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살짝 흔들면서 아휴, 저는 젊잖아요.”하는 게 아닌가. 그럼 나는 늙었다고? 기껏 해봐야 대여섯 살 아래 같은데. 자칭 젊은 사장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문을 밀고 나왔다. 건너편 상가 세탁 수거 배달간판이 이제 단골을 바꿀 때라는 듯 크게 보였다. 오늘의 운세가 뭐였더라. ‘과분한 칭찬을 경계하라였나.

횡성한우 정육점에 갔다. 소를 잡은 날인가 보다. 아저씨는 갈고리에 매달아 놓은 육괴를 손질하고 있다. 예전에는 소 한 마리가 들어오면 꼬리, 사골, 내장 등이 다 나갔는데 요즘은 살코기만 팔린다고 한다. 나는 고기 요리만 반찬인 줄 아는 아들이 올 때만 정육점에 간다. 하지만 가게가 아파트 1층에 있어 날마다 지나다닐 수밖에 없다. 아저씨는 담배 피우다가도, 전화하다가도 나만 보면 인사를 한다. 마트에서 고기를 사 올 때면 아저씨가 볼까 봐 잰걸음을 친다. 안 보는 척하지만, 아저씨는 매의 눈으로 시장바구니를 훑어본다. 오늘은 대패삼겹살을 사려고 들렀다.

아저씨는 텔레비전에 나온 요리를 하느냐고 물었다. 항상 한우 투 플러스만 먹는 젊은 사모님들이 이걸 사 갔단다. 투 플러스는 연중행사로나 사는 내게 들으라는 말 같다. 요리할 줄 모르는 사모님은 생고기만 구워 먹으면 쉽다. 요리 좀 하는 나는 돼지고기만으로도 열댓 가지 요리를 할 수 있다. 아저씨는 큰 인심 쓰듯 고기 소스를 봉지에 넣는다. 들큰한 시판용 소스는 하수나 쓰지 어찌 요리 고수가 쓴다고. 소스를 물리치고 나는 대패삼겹살만 들고나왔다. 대형마트 옆에 있어 잘 될까 걱정했던 푸줏간이 유지되는 이유가 젊은 사모님들의 투 플러스 사랑이었나 보다. 오늘의 운세는 뭐였지.

 

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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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업한 옷 가게 앞이다. 주인 혼자 있으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문밖에 있는 미끼 상품만 들춰 보기도 하고, 손님이 있을 때 들어가서 대충 눈요기만 하고 나왔다. 내 취향인 옷이 많았지만, 얼핏 본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오늘은 손님이 욱적북적이고 있어 이때다 하고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순간이 손님이 나가려던 때였는지 순식간에 싹 빠져나가고 혼자 남았다. 맨드리가 고운 사장님이 엉거주춤 서 있는 내게 다가왔다. 옷가슴에 있는 브로치를 위쪽으로 옮겨주면서 나를 거울 앞으로 돌려세웠다. 살짝만 바꾸어도 훨씬 해 보인단다. 주인은 오래 보아 온 사람처럼 곰살가웠다. 손님이 많다고 했더니 오픈 두 달 만에 자리를 확실히 잡았다면서 이어지는 말이 청산유수다.

원래 전공은 무용인데 액세서리 강의도 했어. 자기 지나다니는 거 자주 봤는데 얌전하더라. 들어와서 구경해. 내가 동생 같으니까 옷 코디해 줄게. 백화점은 못 가더라도 홈쇼핑 옷은 절대 사지 마. 얌전한 얼굴 다 버려. 저쪽 주상복합에 사는 사모님들은 부자인가 봐. 아까 봤지 사모님들. 옷 들어오는 날 연락하면 와서 싹 쓸어 간다니까. 언니는 이거 한 번 입어 봐. 우리 애들 다 어울리지만, 애가 딱이야. 오늘 많이 팔아서 그냥 가져온 가격에 줄게. 말도 안 되는 가격이야. 나는 옷 가게만 하면 왜 이리 잘되나 몰라. 하도 심심해서 오픈했더니 또 이 난리네.

주인 여자는 얼굴 주름에 비해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내 호칭은 사모님이 아니고 동생과 언니, 자기로 왔다 갔다 했다. 오늘의 운세는 빠른 선택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였지만 사장님 눈에 얌전하게 보였다니 어울린다는 카디건을 빠르게 샀다.

주말이 지나자 날씨가 따뜻해졌다. 옷 가게 앞을 지나는데 눈에 익은 옷이 문밖에 나와 있다. 반 토막이 난 값이다. 벽에 붙은 현금 교환 환불 X’ 종이가 나를 비웃는 듯 바라보고 있다. 날씨 탓만은 아닌 열기가 온몸으로 확 퍼졌다. 오늘의 운세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울고 싶어도 웃어야 할 때가 있다.’

오늘의 운세, 재미로 떠올려보면서 웃음 짓기도 하고 털어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운세는 무료한 나날이 이어질 듯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 일 없는 무료한 날들의 연속이야말로 크나큰 축복이 아닐까.

 

최미아(수필가)

 

최미아 수필가
최미아 수필가

 

최미아 프로필

수필과비평등단. 수필과비평작가회의, 부천수필 회원.

수필집 잔잔한 시하바다(2005), 밤달애(2014

수필과비평문학상, 복사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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