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갓 벤 풀에서 지리산 뱀사골 고향 냄새가 묻어나온다. 그 향내는 아련히 묵혀 두었던 그리운 입맛을 생각나게 한다.
70년대, 가난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삶의 일부분이었다. 쌀이 귀해 밀가루 한 포대로 여름을 날 때도 많았는데 그나마 감자가 있어서 배고픔을 덜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콩밭에서 자란 싱싱한 열무는 시골 농가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작물이었다.
어머니는 그 콩밭에서 자란 열무로 김치를 담그셨다. 한여름 뙤약볕을 등에 업고 밭에서 금방 딴 홍고추, 제피에다 삶은 감자와 식은밥 한 덩이를 넣고 돌확에 고추가 걸쭉해질 때까지 북북 쪼개듯 간 다음 열무와 버무리면 양념이 어우러져 착 안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배도 출출하고 먹을 게 별로 없던 시절, 열무김치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 육 남매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특유의 제피 향에 입으로는 “아휴 매워”를 연발하면서도 먹고 또 먹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고향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옛 맛을 잊지 못하고 가끔 큰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오는 날 다른 건 몰라도 남원 콩밭 열무를 머리에 이고 오셨다. 다 같은 채소인데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궁색하게 사 들고 오시는지, “열무가 다 똑같지, 남원 열무라고 별다를까”라며 결혼 전까지도 뱀사골 열무김치에 대한 어머니의 극성스러운 집착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철모른 시절 볼멘소리하며 투정 부렸던 마음이 후회되었다.
유년의 여름방학은 벼가 익어 갈 무렵 논두렁에서 참새를 쫓으며 지냈다. 점심으로 싸 온 열무김치와 보리밥 한 덩이로 배고픔을 잊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지금도 잘 익은 김치의 향내는 그 시절을 소환해 준다. 약간 거칠고 걸쭉한 국물이 소박한 고향 맛이다. 또한, 시원하게 익은 김칫국물을 넉넉히 부어 국수나 즉석 냉면을 말아 먹어도 그만이다.
요즘은 사계절에 다 열무가 나온다. 겨울 지나고 봄이 오니 김장 김치에도 슬슬 싫증이 난다. 시장에 나가 열무 한 단을 사서 김치를 담그며 그때 우리 육 남매의 밥상에 함께 올라왔던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떠올려 본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혼자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시각과 후각, 미각 등 모든 감각을 통해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 맛. 다시는 느낄 수 없지만, 동생들과 콧물을 훔치며 먹었던 그 시절, 추억의 뱀사골 열무김치가 그립다.
글┃손도순(부천시 인생이모작지원센터 상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