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대장동 마을회관

무작정 찾아간 대장동 마을회관

부천엔 대장동이라는 곳이 있다. 내 기억 속 대장동은 12-1번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엉겁결에 내리게 된 종점이 있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차비가 한 푼도 없었던 나는 기사님께 통사정하여 겨우 집으로 가는 버스를 얻어 탔다.) 부천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어디를 둘러봐도 영락없는 시골이었다. 그때만 해도 훗날 콩나물신문 기자가 되어 다시 대장동을 들락거리게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5월 22일 금요일, 원종복지관 이은주 사회복지사와 함께 무작정 대장동 마을회관에 찾아갔다. 원래는 어르신들이 쑥개떡 만드는 모습을 취재하려 했지만 가는 날마다 이미 작업이 끝나 있거나 작업 일정이 없었다. 속절없이 시간만 흐르는 가운데 도대체 어떻게 취재해야 할지 머리카락만 쥐어뜯던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마을회관으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이은주 사회복지사는 이미 대장동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공식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점심 먹고 나른해질 무렵이면 마을회관에는 고스톱 판이 거나하게 벌어진다고 했다. 물론 억대 도박과는 거리가 먼 ‘쩜 50원’짜리 고스톱이었다. 그러나 이은주 사회복지사와 내가 다다르니 마을회관엔 할머니 두 분이 계실 뿐이었다. 나는 내 소개를 한 뒤 가방을 내려놓고 그냥 바닥에 질펀히 앉아 버렸다.

웬 낯선 젊은 놈이 불쑥 찾아온 게 신기했는지 두 할머니는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은주 사회복지사는 친정집에라도 온 듯 편하게 앉아 어느새 도란도란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고스톱 많이 따셨어요?”

“따긴 뭘 따. 오늘도 다 잃었어.”

“오늘 끗발이 개끗발이었다니까.”

“○○ 어르신은 어디 가셨어요?”

“다 잃고선 삐져서 갔지 뭘. 홀홀홀(웃음소리).”

순간 나는 내 오랜 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스톱 배우기’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명절 때마다 친척들이 둘러앉아 화투장을 담요에 내리꽂으며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몇 번 배우려고 해 봤지만 그때마다 너무 어려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만 맞추면 된다고 했는데도 내 눈엔 화투장들이 다 그게 그거인 것처럼 보였다.

 

왼쪽이 대장동 노인회장 권서연 할머니, 오른쪽이 '고스톱 스승님' 조리자 할머니

'고스톱 스승님'을 만나다

나는 옆에 앉은 할머니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저 고스톱 좀 가르쳐 주세요!”

“엥? 뭐라고?”

“제가 아직 고스톱을 칠 줄 모르거든요.”

기자랍시고 찾아온 놈이 난데없이 고스톱을 가르쳐 달라니 할머니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은주 사회복지사가 심심한데 고스톱이나 한 판 치자고 맞장구를 쳤다. 어느새 앞에 담요가 깔리고 화투장이 놓여졌다. 할머니들은 내가 정말 이 나이 먹도록 고스톱 하나 칠 줄 모르는지 반은 믿고 반은 못 믿는 표정이었다.

패가 깔리고 내 손에는 화투 일곱 장이 쥐여졌다. 물론 나는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반면 할머니들은 노련했다. 화투장을 담요에 능숙하게 내리꽂으며 담요에 깔린 패들을 연방 깨끗이 쓸어 갔다. 할머니들이 깔깔깔 웃는 소리가 마을회관을 가득 채웠다. 나도 덩달아 우하하하 따라 웃게 되었다. 순식간에 한 판이 끝나고 나는 450원을 잃었다.

“어쩜 이 총각 정말 하나도 모르네. 나한테 수업료 내고 배워야 쓰겄어.”

“고스톱은 원래 돈 잃으면서 배우는 거여. 동전 한 보따리는 잃어야 된다니깐.”

내 왼쪽엔 이은주 사회복지사가 앉았지만 내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고스톱 못 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패가 꼬인다”며 투덜거렸다. 오히려 나를 도와준 건 오른쪽에 앉은 할머니였다.

“봐봐. 이건 껍데기니까 이쪽에 이렇게 모아두고, 이건 쌍피인데 이거 먹으면 2점이여. 그리고 요렇게 석 장이 모이면 고도리인 거여. 청단이랑 홍단은 좋은 거니까 막 버리지 말고. 알겄어? 5점 나면 한 판이 끝나는 거여.”

나는 ‘스승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충실히 따랐다. 먹으라고 할 때는 먹었고 버리라고 할 때는 버렸다. 그렇게 두세 판이 흘러가다 보니 내가 잃은 돈은 천 원을 넘어 점점 불어났다.

“워매, 이젠 그림도 맞출 줄 아네!”

“이 총각이 바보는 아닌게벼. 홀홀홀.”

옆자리 할머니의 지도를 받아서 그랬는지 갑자기 ‘끗발’이 서기 시작했다. 오른손목의 힘으로 화투장을 메다꽂고 패를 뒤집으니 쌍피에 광에 온갖 좋은 패들이 모여들었다. 금세 5점이 나면서 나는 550원을 땄다. 그러고는 두세 판을 더 휩쓸었다. 뽑는 패들마다 ‘대박’이었다. 옆자리 이은주 사회복지사는 “이제 감을 좀 잡으신 것 같네요?”라며 웃었다.

그러나 역시 ‘첫끗발이 개끗발’이었는지 내가 판을 휩쓰는 일은 더는 벌어지지 않았다. 할머니들이 다시 현란한 솜씨를 뽐내며 초록색 담요 위를 지배하는 모습은 초록색 운동장에서 수비수 대여섯 명을 제치고 유유히 골을 넣는 축구선수를 떠올리게 했다. 설사 리오넬 메시가 온다고 해도 할머니들처럼 아름다운 고스톱 기술을 펼쳐 보이진 못할 것이다.

“아유, 이제 팔 아파서 못 치겄어. 나중에 동전 싸들고 다시 와.”

“그려. 총각은 아직 멀었어. 만 원은 더 잃어야 혀.”

“다음엔 수업료 내고 배워. 홀홀홀.”

결국 나와 이은주 사회복지사만 홀랑 잃은 채로 고스톱 판은 허무하게(?) 끝났다. 할머니 한 분(권서연 대장동 노인회장)은 저쪽에 있는 길고 푹신한 의자에 누웠고 내 ‘고스톱 스승님’ 조리자 할머니(75)는 기자 신분으로 돌아온 내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흥미진진한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 조리자 할머니 (사진 : 이은주)

처음엔 '오빠 친구'였던 사람과...

“여기서 산 지 오래됐지. 내가 1941년생인데 22살에 부천으로 시집 와서는 이날까지 살고 있어. 원래 고향은 부평 백마장이지만 이제 여기가 제2의 고향이지. 그때는 아스팔트도 없고 그냥 비포장도로였어. 버스 타려면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데 땅이 시뻘건 흙이라서 버선이 빨개지고 땀에 젖고 아주 말도 못했어.

내가 그러니까, 53년 전, 1962년에 시집 왔어. 나는 인천 사람인데 신랑은 부천 본토백이였지. 내 친오빠 친구였어. 백마장에 포부대가 하나 있었는데 신랑이 우리 오빠랑 같은 부대에서 같은 내무반에 있었지. 신랑은 술은 일등으로 잘 마시는데 담배를 안 피워. 오빠는 술은 잘 못 먹는데 담배는 피우고. 그래서 신랑이 우리 오빠한테 담배 나오는 걸 다 줬대. 둘이 그래서 친해졌다는 거야.

그러다 오빠가 춘천 미군부대로 특명이 나서 그쪽으로 갔어. 그리고 얼마 뒤에 신랑도 부산 미군부대로 가게 됐거든. 근데 집에 오빠가 없는데도 신랑이 내가 마음에 있었는지 자꾸만 우리집에 오는 거야. 부산으로 가기 전날에도 우리집에 왔어. 왔으니 밥은 해서 먹여야 하잖아. 그래서 밥 해 줬지. 근데 다 먹고서도 자기 집으로 갈 생각을 안 해. 그러더니 우리 엄마를 만나고 가겠다는 거야. 그래서 울 엄마는 먼 데 가셔서 오늘 늦게 돌아오실 거라고 했더니 그제야 내일 부산으로 가게 됐다고 말하고선 갔어. 그때만 해도 그 사람이랑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지.

신랑이 부산으로 내려간 뒤에 편지가 왔어. 나를 좋아하네 어쩌네 하는 내용은 없고, 그날 밥 잘 먹었다, 어머니 뵙고 왔어야 하는데 아쉽다, 뭐 이런 내용이었어. 근데 마지막에 답장을 기다리겠다는 말이 있더라고. 아니 밥 잘 먹고 갔으면 된 거지 답장은 무슨 놈의 답장이야. (웃음) 그래서 안 했지.

아버지의 한마디, "그 사람, 내가 보기에 참 괜찮다."

얼마 후 오빠도 제대하고 신랑도 제대했어. 그때만 해도 교통도 불편하고 전화도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선 우리집에 신랑이 또 왔어. 그렇게 또 뻔질나게 우리집을 들락거리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그 장서방이라는 사람, 내가 보기에 참 괜찮다. 얼굴 번드르르하게 찍어 바르고 다니는 놈은 속만 썩인다. 촌에서 농사 짓는 사람이니 밥은 안 굶을 거다.’ 근데 그때 사촌오빠가 하나 있었는데 신랑이 살던 집 근처에 살아서 그쪽 집 사정을 다 알아.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사촌오빠한테 신랑 얘기를 다 한 거야. 나를 그리 보내면 좋겠다고.

사촌오빠가 신랑 집에 가서 얘기를 했는지 시어머니 되실 분이 내 사진을 봤으면 싶대. 그래서 내가 옥색 저고리에 아주 근사하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었어. 시어머니도 내 사진 보고서는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대. 그런데도 그때까지도 나는 신랑이 마음에 안 들었어. 키도 너무 작고 몸도 땡땡했거든. 근데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것으로 알고 죽겠다고 유언을 남기셨어. 그래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지.

시어머니가 식구들 다 데리고 우리집에 왔어. 지금으로 치면 상견례 같은 거였지. 내가 젊었을 땐 말도 못하게 예뻤어. (웃음) 그래서 시어머니가 홀딱 반한 거야.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과 내가 결혼하는 걸로 알고 있겠다고 하고선 가 버렸고 며칠 뒤에 사주단지를 보냈어. 그때 신랑이 스물일곱, 내가 스물둘이었지.

신랑의 '신식 결혼 대작전'

결혼 날짜를 잡았는데 우리집에서는 예식장에서 신식으로 하자고 했고, 시어머니 쪽은 구식으로 하자고 했어. 나도 그렇고 우리 식구들도 무슨 구식이냐고, 구식 싫다고 했지. 신랑이 자기 엄마를 이겨야 하는 상황인데 자꾸 시어머니가 구식으로 하자고 하니까 신랑이 일꾼들 사랑방으로 몰래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버렸어. 당장 내일이 결혼식인데 신랑이 없어진 거야. 시위를 한 거지. (웃음) 설마 일꾼들 방에 숨었을까 싶어 식구들이 끝까지 못 찾았대. 그러다 결혼식 하는 날 아침에 신랑이 나타났어. 우리집에선 부평 문화예식장이라고 식장까지 다 잡아 놨거든. 신랑만 오면 결혼하는 거였어. 그날 시어머니랑 시댁 식구들이 다 같이 왔는데, 결혼식 끝나고 나니까 시어머니가 아들 하나 더 있으면 이렇게 결혼시키고 싶다고 하더라고. 막상 보니 신식이 마음에 든 거야.

그때까지도 결혼은 할 수 없이 한 거였어. 부모가 정해 줬으니 해야겠다고 마음먹고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딸만 다섯이었는데 언니랑 동생들은 어릴 때 다 시집가고 나만 나이 먹고서 제일 늦게 갔지.

"장수원이가 내 친척이야."

시어머니 사는 집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신랑, 나, 시어머니, 동서, 중학교 1학년짜리 조카 이렇게 나까지 식구가 다섯이었어. 시아주버니는 6.25때 나가서는 소식이 없었고. 그 조카가 나중에 결혼해서 아들을 둘 낳았는데 둘째가 가수야. 젝스키스라고 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정글에 가서 고기도 구워 먹고 개구리도 잡아먹고 하고 있더라고. 장수원이라고... 걔야. 얼굴 갸름하고 잘 생겼지. (웃음) 이번 6월에 우리 큰딸 둘째 아들이 결혼식을 하는데 거기서 축가 불러 주기로 했어.

우리 신랑은 그 당시에 땅이 많았지. 농사도 일꾼들 데려다 지었어. 자기는 농사 하나도 지을 줄 몰라. 그러다 서른다섯에 공무원 시험을 봤어. 성남, 부평, 인천 여기저기 인사이동으로 돌아댕기다가 마지막엔 부천시청에서 55살에 정년퇴직했지. 신랑하고 46년을 살며 아들 둘, 딸 둘을 낳았어. 그러다가 술을 하도 마시니 간경화로 나보다 먼저 갔고.

처음 시집 왔을 때는 농사일이 엄청 많았지. 밥을 이고 논으로 가면 일꾼이 도망가고 없어. 시댁에서 오래 산 일꾼인데 일이 힘들어 도망간 거야. 그래서 시어머니한테 도망갔다고 하면 이놈 자식이 또 어디로 갔냐고 그래. 며칠 지나면 또 일하러 기어들어와. 시어머니가 야단하시면 힘들어서 잠깐 나갔다 왔다고 하고. (웃음) 하여튼 농사일이 정말 많았지. 내가 또 힘이 남자처럼 세서 지게질도 하고 쌀가마니도 나르고. 그래서 두 다리가 아직도 아파. 무서워서 수술도 못해. 신랑은 애초에 힘든 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매일 홀짝홀짝 술만 먹었어.

그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나만 이렇게 늙어 버렸네. (웃음)”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대장동 들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올까

긴 이야기가 끝나니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어느새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궁금한 것들은 더 있었다. 쑥개떡 이야기며 부천시의 대장동 산업단지 개발이며 하는 것들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것들은 나중에 하나하나 깊게 다뤄야 하는 기사거리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헤집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젊은 시절의 자신과 마주해야 했던 할머니를, 오늘은 이만 쉬게 해 드리고 싶었다.

기자랍시고 찾아온 놈이 고스톱을 가르쳐 달라고 하질 않나, 갑자기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말도 못하게 예뻤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되질 않나. 고스톱으로는 몸이 지치셨을 것이고, 기억으로는 마음이 피곤해지셨을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은 함부로 들여다보지 말고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묻어 둬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이은주 사회복지사와 나, 할머니 두 분이 함께 마을회관을 나오자 들녘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에서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일생과도 같은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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