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왔다. ‘생활복’과 ‘반바지 교복’ 덕분에 학생들의 여름나기는 그나마 조금 쉬워졌다. 교사들이 생활복을 찬성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마치 입고 꿰맨 것 같은 타이트한, 심지어 터질 듯한 교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최근에 반바지 교복이 환영받는 것도 짧아도 너무 짧고, 걷기조차 힘든 폭 좁은 치마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학생인권조례 이후 생활규정 개정의 주요 쟁점 중 하나가 교복에 대한 통제였다. 치마 길이, 바지 폭, 교복 변형과 관련된 조항이 만들어졌고 소위 ‘생활인권부’는 교복과의 전쟁을 치뤘다. 특히 여학생의 교복 변형은 집중 관리,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학생답지 않다는 이유로 치마단과 다트는 뜯겨 나갔다.

 1970년대의 미니스커트 장발 단속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짓이라고 하면서 여학생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몸은 정신과 다르며 정신에 비하여 열등하고 욕망 앞에서 늘 굴복하는 존재이다. 특히 여성의 몸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남성들을 현혹시키며 위험에 빠트리는 존재이기에 철저히 통제되어야 한다. 나이 어린 여성의 몸은 특히나 더더욱 위험하다. 타인의 공격 앞에 취약하고 성인-남성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에 옷 속에 꽁꽁 감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의 몸에 대한 성인-남성의 시선이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욕망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교복은 여학생이 성적 대상인지 아닌지를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지표라고 인식한다. 따라서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교복 통제는 필수적이고 통제를 거부하는 학생들은 위험한 존재이며 학생이지만 학생이 아니다. 그들을 부를 때 ‘술집’이란 단어가 종종 들어간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몸과 다르다. 먹고 마시고 움직이고 접촉하는 것 이외에도 임신, 출산, 양육이 가능한 몸이다. 아무리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능력이 탐나는 남성들은 여성 자체를 소유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소유가 정당화되려면 여성의 몸은 위험한 것, 통제가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했다. 또한 보호받아야 할 몸(선한 몸)과 그렇지 않은 몸(나쁜 몸)의 구별이 필요했다.

 옷은 몸의 연장이다. 짧은 치마와 몸매가 드러난 옷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경우라면 교복이 아니라 몸을 생각해봐야 한다. 몸을 바라보는 성의 정치도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교복 통제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여학생들의 끈질긴 저항 때문이다. 교복 속 몸의 정치는 새롭게 읽어야 할 일상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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