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며칠 전 프란치스코 교종은 미국을 방문해서 기후변화에 대한 선진국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라고 미국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기후변화의 피해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이 간다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엊그제 주말 뉴스는 바로 기후변화를 방치한 대가로 보이는 자연 재앙의 참담한 지구촌 모습들을 전했다. 그중에 과테말라에서 산사태로 수백 명의 주민이 희생을 당했다. 지구와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한 몸이다.

자연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안타깝게도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도구주의적 자연관이 그것이다. 그래서 수 십 억 년 동안 품어온 온갖 자원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구 캐내서 쓰다가 함부로 버린다. 이로 인하여 자연은 인간의 손에 의해 착취당하고 끝내는 그것도 모자라 쓰레기장으로 전락해가기도 한다. 지구는 이미 쓰레기장이다. 이제는 우주 공간까지도, 우주를 정복의 대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인간들이 내다 버린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그의 책 「성장숭배」에서 이렇게 말한다. “1990년에 우주왕복선이 낡은 인공위성을 수거해서 지구로 가져온 적이 있다. 미 항공우주국NASA과학자들이 세밀히 분석한 결과, 이 인공위성 표면의 작은 반점들은 그동안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 탐사선들이 내다버린 대소변 물질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우주쓰레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중에는 퇴역이 임박한 위성들을 지구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위성묘지 궤도graveyard orbits"로 밀어내는 방법 등이 들어 있다. 우주 공간에는 ‘죽은 위성’들을 위한 공동묘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태도는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고 보는 생각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 만큼 자연이 질병으로 앓게 되면 인간도 결국 아플 수밖에 없다는 일원론적인 자연관이다. 그래서 자연이라는 커다란 유기체적 질서 안에서 인간이 좀 더 겸손한 존재로 살아가는 태도이다. 인간은 자연과 그 일부로써 연결되어 있다.

약 2년 전쯤 어느 강연회에 들렀다가 「녹색평론」을 알게 되었다.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경제성장을 위해 우리는 미래세대의 자산까지 끌어다 부채의 형태로 발전이라는 허상에 투입한다. 정치적 결정의 변화가 없는 한 우리 삶을 개선시키는 데 아무런 영향도 없는 성장주의는 지속될 것이다. 경제성장이 온 지구촌 사람들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망상이 지배하는 세상이니 모든 권력은 기업이나 조직된 자본에게로 옮겨 갔다. 권력이 국가와 정부를 떠난 것이다.

지금 지구촌의 많은 국가와 정부는 시장 권력의 시녀일 뿐이다. 세월호 사건의 본질도 이 범주 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선거로 뽑은 그들의 정부가 공적 자원에 대한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때, 민주주의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콩나물신문 편집회의에서 6학년 어린이 민주의 글 때문에 36호의 특집주제를 ‘자유’로 하기로 하였다. 1면에 싣기로 한 충격적인 글을 읽고 어린이의 ‘자유’가 어디에 맞닿아 있는지 고민했다. 시스템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회와 그것을 운영하는 어른들이 이 어린이에게 어떤 야만적인 억압을 주었기에, “우리 왜 태어났지? 죽고 싶다. 우린 공부에 묻혀 살아야 돼?”라고 울부짖게 했을까. 그 누구도 이 어린이에게 태어난 이유를 바로 알도록 도와줄 수가 없었던 건 아닐까. 오직 1등 하는 것이 ‘태어난 이유’라면 그 건 정글 세계의 동물들에게나 통하는 상식일 뿐이다. 이걸 모르는 어른이라면 어린이의 보호자 지위를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엉터리 목적에 휘둘리다보니 민주의 마음이 학교는 물론이고 가족까지 떠난 건 아닐까?

어른들이 이 어린이의 황폐해진 마음을 어느 만큼은 짐작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찰하고 수정할 만큼 행동할 실행력은 없는 것 같다. 어른들이 얼마 전 어린이로서 통과해야 했던 몹쓸 터널을 이제 자신이 가장 사랑한다는 아이들에게 똑같이 승계·반복하도록 강요하는 건 아닐까?

경쟁과 승부가 다이고 참 공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학교생활과 가정생활 그리고 이 두 개 기초공동체를 삭막하게 하는 진화론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세대를 넘어 우리의 아이들을 질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선 어른들이 먼저 잘못된 철학과 타성과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실로 아이들이 어른을 걱정하는 형국이다.


여성주의 인터넷 저널 일다에는 "농사짓는 반항아로 사춘기를 나다"라는 기사가 있다. 폭풍 같은(필자의 말) 사춘시를 막 통과한 여성이 올린, 7년 홈스쿨링을 통한 ‘정체성 찾기 스토리’이다.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산골에서 5백 평 밭농사를 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19살이 되기까지 제도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농사와 가사 일을 분담하되 이는 단지 자기가 먹을 걸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노동이었고, 용돈을 스스로 해결했으며, 기타도 배우면서, 사춘기를 무사히 넘기고, 녹색당에도 가입하였고 이제 대학진학을 고민하고 있단다. 그러기 위해 수학과 물리학을 독학하면서 장래에는 환경 관련한 전문가로서 일하고 NGO활동도 하기 위해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가기로 했단다.

이렇도록 땡볕 아래서 농사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엄마와 티격태격 했을까 싶다. 스스로의 고백처럼. 그러면서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게다가 사실 나는 집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고. 어린 나이에 힘들고 먹는 것 말고는 땡전 한 푼 없는 농업 노동을 하면서도(사실 자발성이 없다면 아동노동착취에 해당할 것임) ‘집을 무척 좋아했다면’ 그 집은 과연 어떤 집이었을까. 우리는 이런 가정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기회의 평등 운운 하면서 가난이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지고 있고, 교육은 오직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만을 키우는데 골몰하여 모든 교육주체들은 똑같이 황폐해져 가고 있으며, 승자가 되는 것과 부의 축적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양 말한다. 중고등학교의 비 입시과목 교사들은 일찌감치 전공을 바꿔타기 위해 과외공부를 해야 했다. 모든 인문학은 대학 밖으로 쫓겨나서 평생학습센터에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대학은 단지 기업을 위해 일하는 직업인 양성소가 되어가고 있다.


이 세상의 운영 권력은 오래 전에 신자유주의 경제학 추종자들에게로 넘어갔다. 이들에 의하면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오직 영혼 없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지나지 않는다. 효용을 쫓아 합리적 의사결정을 할뿐이라고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스스로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마케팅의 노예이다. 그리고 세상이 어찌 경제인이라고 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들만 득시글거리는 타락한 세상이어야 하는가?

녹색의 세상을 상상할 때 어느 하나 마음 편한 데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각자의 삶을 나눈다. 차 한 잔을 하면서 「녹색평론」이라는 격 월간지를 놓고. 서로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녹색이란 이름으로 서로 다른 하나가 되는 걸 확인한다. 11월 모임은 2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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