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보니 농활이란 게 있더라. 난 주변에 대학생이 한 명도 없어서 농활이 뭔지 몰랐다. 다만 대부분의 집회에 참여하는 성실한 학생운동 새내기였기 때문에 농활도 당연하게 참여했다. 우리 과는 옥천 안내면인지 안남면인지에 위치한 방하목이라는 굉장히 외진 마을로 들어갔다. 농민분들의 환대도 좋았고, 막걸리에 취해 농사일 하는 것도 재밌었고, 힘든 노동 중간 중간 먹는 새참과 일 끝나고 먹는 밥맛이 너무나 꿀맛이어서 대학 내내 농활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게 됐다.

2학년때부터는 마을을 옮기게 되었다. 충북 농민회 안에서 알력다툼 때문이라고 얼핏 들었던 거 같다. 아무튼 우리학교에서 가장 많은 농활대를 자랑한 문과대는 옥천을 떠나 충주로 가게 되었다.
새로 들어간 마을은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좀 어려웠다. 농민분들은 착하셨지만, 이상하리만치 술을 멀리 했다. 일하는 중간에도 그렇고 일이 끝나고도 우리와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일 끝나고 밤에 우리끼리 술을 마셨지만 흥이 나질 않았다.

사실 그 마을에선 예전에 농활을 하다가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다. 어느 농민이 여학생을 성추행했다고 들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그 마을 농민회 사람이었고, 그 사람을 제외 시키고 농활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으로 농활대를 다시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들어가기 꺼려하던 그 마을엔 당시 문과대에서 에이스(라고 우리만 생각했었나?)였던 우리 과가 들어가게 된 거였다.
낮에 일을 하면서도 농민분들에게 얼핏설핏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예전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 성격이 괄괄해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못막는다는 것, 하지만 이제 결혼을 했으니 예전 같은 그런 일은 안 할 거라는 이야기도.

그렇게 며칠을 우리끼리 지내던 어느 밤, 마을 농민회장님이 찾아왔다. 농민회장님을 중심으로 삥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농민회장님은 우리에게 새로온 마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뭐 그런 이야기를 물어보고 우리도 성심성의껏 대답하며 시간을 보냈다. 확실히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야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처음 보는 농민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첫눈에 보기에도 강한 인상, 그리고 그 농민을 보자 표정이 찌그러지는 농민회장을 보면서 이 사람이 바로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라는 걸 우리 모두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우리가 긴장한 걸 봤는지 농민회장님이 나서서, 여긴 왜 왔냐고 돌아가라고 말을 했지만 말에는 힘이 없었다. 그 남자는 뭐라 한마디 내뱉고는 농민 회장님에게 발길질을 한 번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농민회장님은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그 남자가 그러고 나서 그 자리에 머물면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니면 그냥 돌아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마을을 옮겼다.

그게 2000년이었으니까 벌써 15년 전 일이다.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나지 않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풍기는 그 기운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기운은, 꼼작하지 못하고 그저 얻어맞기만했던 농민회장님의 표정과 대비되어 그 마을의 권력자가 누구인지 여실히 보여줬다.
그 남자가 풍긴 기운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 혹은 <이끼>의 이장 같은 작은 사회의 절대권력자가 내뿜는 기운이었다.

우리가 옮긴 마을은 정반대였다. 그 마을의 농민회장님은 그 면의 농민회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우리는 새로운 마을의 친절하고 술 좋아하는 농민들 덕에 금새 적응하게 되었다. 새로운 마을의 농민회장님은 우리가 도망치듯 나온 마을 상황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무척 답답해했다. "아니, 사람들이 합심하면 될 것을, 그 한 사람을, 그걸 왜 못 이겨."라고 하셨다.

그뒤로도 여러 집단에 속해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체로 자그마한 집단이었다. 독재자들도 여럿 만나봤다. 물론 그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 밖에서는 대체로 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경우가 많았고, 자기 집단 안에서는 독재를 하더라도 집단 밖에서는 권력에 맞서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런 독재자들은 대체로 그 집단의 돈줄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권력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절하게 저항하거나 싸우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굳이 거부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싸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저항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천국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저항하다 만신창이가 되어 쫓겨나거나 떠났다.

그 순간 순간마다 나는 15년 전, 이제는 마을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그 농촌 마을에서 딱 한 번 본 그 남자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 마을 농민회장님의 말씀, 여러 사람이 합심해서 그 한 사람을 못 이기냐는 말도 생각이 났다.
물론 그 한 사람 내쫓는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그 한 사람이 있다면 영원히 문제가 반복될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할까...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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