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오쇠리(五釗里)의 모습

▲ 1976년 소두머리골 국토지리원

오쇠리 일대에 포진해 있던 그 많던 집들이 헐리고 폐허가 되어 지금은 풀들만 무성한 장소가 되었다. 자연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몇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으면 나무와 풀이 뒤엉켜 숲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오쇠리에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양천현을 거쳐 오는 길이 있다. 소사로 970번길이다. 아스팔트 포장만 새로 되어있지 옛길이나 다름없다. 이 길은 조선시대 때부터 있던 길이다. 양화진에서 출발해서 안양천 하구에 위치한 철곶포에 당도하고, 양천현을 지난 뒤 바로 오쇠리에 닿게 된다. 이 오쇠리를 지나 대장마을 거쳐 대교인 한다리를 건너게 된다. 한다리 너머엔 부평도호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양에서 부평도호부에 가기 위한 길목에 오쇠리가 자리를 잡은 셈이다. 부평도호부에서 정확하게 10리길에 위치해 있고, 양천현에선 20리길에 해당되었다.
오정동에서 오쇠리로 가는 길이 있다. 오정로이다. 1939년도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었다. 당시 소사역에서 출발해서 중동벌을 지나고 시우물, 삼정을 지난 뒤 오정을 통과해 김포공항까지 가는 국방도로였다. 소사역은 현재 부천역이다. 해방 뒤에 오정동 미군부대, 부평미군부대하고 연결된 도로였다.
원종동에서 가는 길이 있다. 소사동에서 시작했다고 해서 소사로이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 소사역에서 시작해서 겉저리, 점말, 멧마루를 거쳐 뚫린 신작로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42년도에 개설된 김포공항을 군용비행장으로 써서 오쇠리에서 바로 연결이 되었다. 인천역에서 당시 소사역까지 실어온 비행기 항공유, 화물 등을 실어나르는 도로였다.
김포공항에서 오는 길이 있다. 방화대로에서 오정로로 연결된다.
이 길들이 오쇠삼거리에서 딱 만난다. 실제는 사거리인데 일제강점기부터 부르던 것이 굳어져서 지금도 삼거리로 표시하고 있다.

 

▲ 2000.5.12 오쇠삼거리 집들
▲ 2000.5.12. 오쇠삼거리

해방후 미군이 김포공항을 군용비행장으로 사용했다. 이때 밖오시 너머 산등성이에 미군부대를 운영하면서 오쇠리는 번창하게 되었다. 오쇠삼거리를 중심으로 상가며 약국, 농협이 들어섰다. 유흥업소, 나이트 클럽도 3개나 될 정도로 번창했다. 이렇게 미군에 의해 오쇠리가 번창해온 것이다. 미군부대에서 빨래며 식당 등 허드렛일들을 도맡아 하는 미군부대종사자들이 먹고사는 일터이기도 했다. 무려 1,000여 채의 집이 있었다.
이렇게 번창한 오쇠리가 하루아침에 쇠락하게 된 것은 미군부대가 구미로 이전을 하면서이다. 당장 먹고 살 일거리가 사라진 오쇠리에서 살아가기는 힘들었고, 김포공항이 확장을 거듭하면서 오쇠리 지역을 매입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강제철거가 단행되어 중동신시가지 건설로 사라진 까치울 이주단지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짜 오쇠리는 어디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은 오쇠리는 오쇠리가 아니다. 밖오시이다. 언제부턴가 밖오시가 오쇠리로 불리게 된 것이다.
실제 오쇠리 마을은 대장으로 들어가는 초입 못 미쳐 아시아니항공입구삼거리에서 김포공항 쪽으로 한참을 들어가면 거기가 오쇠리이다.

▲ 1967년 오쇠리, 밖오시
▲ 1967년 오쇠리, 밖오시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1919년도 지도를 보면 오쇠리 마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를 보면 발산동 수명산에서 대장 마을 입구까지 낮은 산이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이름은 알 수가 없다.
대장마을 뒤로 안말인 내촌(內村)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 안말하고 이웃으로 산언덕에 집들이 길게 이어진 오쇠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현재도 이 길게 이어진 산등성이는 남아있다.
현재 마을 집들은 모두 철거가 되고 대신 김포공항 관련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 산언덕의 공항쪽은 이미 활주로로 들어가 버렸다. 발산동 수명산에서 이어진 산등성이하고 오쇠리 마을 사이에 작은 골짜기가 있었다. 오곡동은 이 안말을 지나 김포쪽으로 가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진짜 오쇠리가 있고, 그 바깥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밖오시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한자로는 외오쇠리(外五釗里)이다. 이 밖오시가 현재의 오쇠리이다. 진짜 오쇠리는 안오시로 바뀌었다.

오쇠리(五釗里)의 어원

▲ 2000.오쇠리 마을 위로 내려앉은 비행기

오쇠리에서 ‘쇠(釗)’를 해석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이 쇠(釗)는 쇠, 철이라는 뜻하고 사람이름 쇠로 읽힌다. 먼저 사람이름 쇠로 읽으면서 옛날에 쇠뇌를 뜻하는 노(弩)를 만들던 사람 다섯 명이 숨어 살았다고 해석했다. 쇠뇌는 활의 일종으로 강력한 무기이다. 이것은 쇠라는 말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설사 쇠뇌를 만들던 다섯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마을이름으로 불리기는 어렵다.
다음은 쇠붙이라는 뜻으로 읽으면서 이 일대에 철이 출토되어 땅이름이 생기게 되었다는 엉뚱한 해석을 낳게 되었다. 오쇠리에서 철이 나왔다는 기록이 없고 실제도 없다. 1789년도 호구총수에는 부평부 주화곶면 오금리(五金里)로 표기해 놓았다. 1896년도에 비로소 ‘쇠 금(金)’이 ‘쇠 쇠(釗)’로 바뀌어 오쇠리가 것이다.
이 쇠는 산과 산 ‘사이’라는 뜻이다. 바다와 바다 사이,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 등으로 쓰인다. 이 ‘사이’가 ‘새’로 바뀌고 이 새가 ‘쇠’로 바뀌었다. 애초 ‘밖오새, 밖오쇠’라고 부르다가 밖오시가 된 것이다.
보통 이 쇠를 한자로 쓸 때 소로 보고 ‘우(牛)’로 쓸 때도 있다. 오쇠리 마을은 마을 뒷산과 수명산에서 연결된 산등성이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것이다. 이 쇠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금(金), 쇠(釗)’로 된 것이다.
오(五)는 ‘오리(五里)에 위치해 있다’라는 뜻이다. 부평도호부에서 십리이지만 오리(五里)마다 오리나무를 심어 그 뜻을 나타내듯 오리라는 표현으로 ‘다섯 오(五)’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오쇠리는 ‘오리에 위치한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오쇠리 동쪽으로 다리 가에 사시사철 꽃이 피었다는 전설이 담긴 꽃다리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마을앞 골짜기인 도당골이 있었다.

▲ 2000년 오쇠리에 있던 미화이발관


밖오시 마을

▲ 밖오시에 있던 느티나무의 현재 모습

이 밖오시는 오쇠삼거리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 길 왼쪽, 오른쪽에 포진해 있는 마을이다. 현재의 오쇠리의 원조격인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거라 역사가 제법 오래되었다. 오쇠리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지만 바깥마을로 해석해서 밖오쇠로 불리웠다. 그 밖오쇠가 음이 변해서 밖오시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말로는 밭 한가운데 옻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그 중 마을 바깥쪽으로 있는 옻나무의 독성이 더 강해 이 옻나무 곁을 스쳐가기만 해도 옻을 탔다. 그러나 마을 안쪽에 있는 옻나무는 이보다 옻의 성질이 약했다. 그래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옻을 먼저 타므로 밖에 있는 옻나무에서 옻이 먼저 오른다는 뜻으로 밖오시라 했다. 이게 믿기지 않는 설화이다.
밖오시 마을 전체는 철거가 되었고, 마을에 있는 곳에 오래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오쇠리 전체가 골프장으로 변하면 이 느티나무는 어떻게 될지 그게 관심사항이다.

밖오시 바로 곁에 있는 소두머리골

소두머리골은 밖오시 동쪽 미군부대가 위치한 산등성이 너머에 있다. 지금도 이 소두머리골에선 파농사를 짓는다. 시르미, 증산의 왼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골짜기는 아래에서 강장골 골짜기와 만남을 가졌다. 대머리산 서북쪽에서 시작된 뒷골, 뒷골에서 이어진 강장골 골짜기와 상봉을 한 것이다. 지금은 봉오대로가 동서로 갈라놓았다. 그만 이별을 하고 만 것이다. 현재의 소두머리골은 위쪽만 덩그랗게 남아 있는 형태이다.
봉오대로는 인천광역시 서구 원창동과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사이를 잇는 도로이다. 인천광역시 구간은 과거에 봉화로, 부천시 구간은 오정대로라고 불렸다. 그러던 것이 도로명새주소에서 봉오대로로 통합되었다.

소두머리골의 의미는 소도에서 출발한다. 왜 이렇게 마한, 백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봉배산에서 청동기주거지가 대대적으로 발굴된 뒤로는 이 근방은 이와 연관지어 땅이름을 해석하는 것이 옳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두머리골을 소머리골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는 소머리를 닮아서 붙여졌다는 단어 의미를 그대로 해석해서 생긴 오기이다. 골은 골짜기이고, 머리는 ‘’에서 나온 말로 꼭대기나 마루라는 뜻이다. 보통 ‘크다·신성하다·존엄하다’의 뜻도 가지고 있다.
소두는 원형은 소도(蘇塗)이다. 마한시대의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소도에 영고(鈴鼓)를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제사지내던 당시의 주술적인 민속신앙은 오늘날에도 그 유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솟대가 그것이다. 이렇게 그 의미를 확대해 소두머리골을 해석하면 소도가 있는 산마루 골짜기라는 뜻이다. 또한 소도, 솟대가 있어 신성한 골짜기라는 의미도 갖는다. 봉배산 청동기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신성한 골짜기로 명명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소두머리골 반대편엔 장터고개골이 있다. 장터고개에서 시작한 골짜기라는 뜻이다. 고려시대에 이곳에 장이 섰다 하여 장터고개라고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고려시대엔 밖오시에 장터가 섰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밖오시 장터가 있었는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부천에는 약대의 약대주막, 내촌인 내동의 내촌주막, 벌응절리의 새장터주막, 구지리의 산우물주막이 있었다.

이 장터고개길과 소두머리골을 헐어 새도로를 만들고 있다. 고강동에서 바로 김포공항으로 직접 갈 수 있도록 배려한 도로이다. 도로이름을 ‘소두머리로’로 지었으면 좋겠다.

글ㆍ사진Ⅰ한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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