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하천으로 거듭 나는 굴포천

굴포천이 달라지고 있다. 굴포천 바닥은 여전히 진흙투성이이지만 물은 맑다. 제법 맑아진 물 위에선 청둥오리떼, 해오라비, 백로 등의 놀이터가 되었다. 물 속에는 팔뚝만한 잉어가 헤엄치고 씨알 굵은 붕어의 산란장이 되었다. 이들을 낚아채기 위해서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이어지고 있다. 이들 낚시꾼들은 손맛이 제대로인 붕어낚시에 푹 빠져 있다.
낚시로 낚아 올린 붕어만해도 오십 센티미터가 넘는 월척이 심심찮게 잡히고 있다. 한 낚시꾼은 일 미터가 넘는 잉어가 잡힌 적이 있다고 증언해준다. 거기에다 서해바다에서 올라온 농어나 숭어, 전어까지 잡힌다.
굴포천이 생태하천으로 거듭나면 이들 농어나 숭어를 잡아 회로 먹어보는 그런 꿈을 꿀 수도 있게 되었다. 참게도 심심찮게 잡혀 조선시대 굴포천의 본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경인운하가 한몫을 하고 있다. 굴포천의 한가닥이 경인운하 김포터미널쪽과 연결되어 있어서 경인운하에서 살던 물고기들이 굴포천까지 들락날락 한다. 조선시대 한강에서 올라온 물고기들이 굴포천에 무시로 들락거리는 것과 같다.
굴포천의 다른 한가닥은 막바로 경인운하로 흐르는데, 귤현보가 가로막아 오염을 걸러낸다. 경인운하가 굴포천으로 인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하지만 굴포천 하구에 오염물질이 쌓여있으면 그게 축적되고 결국에는 경인운하를 오염시킬 것이기에 귤현보는 철거가 되어져야 마땅한데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

굴포천 변모의 실체

굴포천이 생태하천으로 서서히 변모를 시작한 것은 부천, 부평지역의 공장폐수, 생활하수를 일관되게 부천시하수종말처리장에서 처리하면서 시작되었다. 공장지대에서 나온 오염물질들이 걸러지고 집에서 나온 하수들도 처리되면서 맑고 깨끗한 물만 굴포천에 유입되게 되었다. 거기에다 부천시하수종말처리장에서 처리한 방류수를 다시 재처리해 상동 시민의 강으로 흘려보내 상동시가지를 한바퀴 돌 게 한 뒤 다시 굴포천으로 흘려보내 굴포천을 맑게 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 부천분지 전체 모습

 

▲ 상동 신시가지가 조성되기 전 굴포천

상동 시민의 강에서 흘러나오는 출구 물구덩에 많은 물고기들이 모여 사는 것은 맑은 물을 좇는 물고기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사람만 맑은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도 맑은 것을 찾아 하천을 두루 헤맨다. 하천이 오염이 되면 물고기들은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입을 물밖으로 내밀어 숨 쉬다가 죽어갈 뿐이다. 예전의 굴포천이 그랬다.
장마철에는 대규모 빗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쌓인 오염물질들을 몇 해에 걸쳐 쓸어가고 또 쓸어가 정화작용을 하는데 한몫을 했다. 경인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겨울철에는 굴포천에 물 흐름이 없어 오염물질이 쌓이기만 했는데, 지금은 하수종말처리장에서 나온 물과 시민의 강 물이 합쳐져 굴포천 하구로 흐르고 있다.
한가지 더 굴포천을 맑게 해주는 것은 갈대이다. 갈대가 굴포천 바닥이나 천변에 가득 포진해 있다. 물 흐는 곳을 제외하고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이 갈대가 굴포천 물을 맑게 해주는 천연정화제이다. 이 갈대숲에 철새들이 몸을 숨기고 쉬기도 하고, 급하게 지나가는 바람도 잠시 머물렀다 간다.

그렇지만 굴포천이 생태하천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의 손길을 더 필요로 한다. 장마철에 떠내려 온 캔, 패트병 등 오염물질들이 여전히 천변에 전시(展示)되고 있다. 굴포천변이 이들의 전시장은 아니지 않는가? 이들을 신속하게 걷어내고, 갈대나 수질오염 정화식물을 더 많이 심고, 굴포천 물이 경인운하로 속 시원히 흘러내리도록 귤현보를 터버리는데, 부천시 행정의 힘이 발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굴포천 모습은 부푼 풍선 모양

이 굴포천을 중심으로 김포, 부평, 계양, 부천이 마치 바람 가득한 풍선 모양처럼 분지를 형성했다. 이를 부평에선 부평분지라고 한다. 부천에선 부천분지로 이름 붙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 부천분지는 현재 중동신시가지, 상동신시가지 등 아파트들로 가득 차 있어 아파트분지로 부르는 게 맞을 것 같다.
부천 굴포천을 중심으로 한 항공사진을 보면 굴포천 하구에 있는 서울 개화산, 김포공항을 거쳐 주화곶(主火串)인 대장동 섬말, 대장마을이 앞으로 툭 튀어 나와 있다.

삼정동인 시우물, 내동, 도당을 아우른 약대가 매봉재 끝자락을 잡고 부천분지 앞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시우물의 상살미, 약대동산의 해골동산이 낮은 산을 형성했다. 현재의 상살미는 삼정공단으로 변해 버려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없다. 바로 뒤편엔 도당에서 멧마루(원종)로 꺾어지는 곳에 있는 대추마루, 거칠고개 같은 언덕을 펼쳐놓은 매봉재가 높지는 않지만 아늑하게 굴포천을 굽어보고 있다.

고강동인 고리울쪽엔 시르미인 증산(甑山)이 있고, 청동기 주거지로 유명한 봉배산이 뒷배경으로 병풍처럼 둘러쳤다. 이 시르미는 김포공항 건설을 위해 바위며 땅을 모조리 파가버려 버린 뒤 폭삭 내려 앉아 지금은 산이 아니라 그냥 평지가 되었다.
봉배산 동쪽에 있는 삼막골, 끝자락에 있는 지골하고 맞물려 멀미인 원미산이 부천시 중앙에 버티고 있다. 멀미 품안에는 조마루, 벌응절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부천에서 제일 높은 산인 성주산이 부천의 동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성주산을 향안산(香鞍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성주산 자락에는 깊은구지를 품고 있고, 바로 옆 거마산 자락은 솔안말을 품고 있다. 그 산자락이 장말까지 뻗어 있었다.
장말 근처에는 먹적골, 사래이, 넘말이 있고, 산우물도 사람들을 키워내는 마을이었다. 성주산 서쪽에는 살미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구지리 마을이 자리를 잡았다. 그 앞으로 중동, 상동에 높은 둑을 막아 만든 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논들마다 백제논 같은 독특한 이름이 붙어 있어 선조들의 고된 노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굴포천을 둘러싼 부평쪽 모습

성주산하고 맞닿은 거마산을 거쳐 인천의 광학산, 만월산이 병풍처럼 우뚝 서 있다. 이 만월산은 원통산의 다른 이름인데 굴포천의 발원지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굴포천 발원지는 원적산이다. 그러니까 물길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 만월산인 원통산 서쪽 자락에 원통이고개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원통이고개는 조선 중종 때 김안로가 굴포천을 깊게 굴착해서 운하를 팔 때 좌절감을 안겨준 고개이다. 이 원통이고개에 있는 바위들이 너무 커서 조선시대 기술로는 더 이상 파낼 수가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너무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원통이고개를 지나 부평역 근처인 동소정을 건너고 천마산을 지나 부평 삼산동의 영성산, 안아지고개를 넘어 계양산에 도달한다. 계양산은 부평, 부천 지역을 통틀어 주산으로 가장 높은 산이고 부평산성이 백제시대 때부터 자리를 잡고 있어서 국토를 지키는 방위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계양산을 가로질러 경명이고개를 넘으면 황어장터가 나오고, 여기까지 굴포천의 물줄기가 밀려들어왔다. 이곳에서 황어(黃魚)가 많이 잡혀 땅이름으로 굳어졌고, 황어장이 서 부천, 부평, 김포, 시흥에서까지 많은 장사치들이 오가는 길목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황어장날을 맞이해 3.1운동의 거센 횃불을 치켜들기도 했다.

황어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임촌이 나오고, 굴포천 하구에서 김포쪽으로는 천정현(天灯峴)이라는 고개길이 있었다. 이 고개길은 한양에서 강화까지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기도 했다.
이들 산들이며 고개들이 부천분지를 둘러싸고 병풍처럼 늘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천분지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조선시대 때는 농사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세곡미를 저장하는 장소로만 활용하기 급급했다.
그래서 부천 솔안말을 비롯해서 세곡미를 저장하는 조창이 많이 세워진 것이 그 이유이다. 이들 조창에 저장된 세곡미를 가지고 당시 조선정부에서 근무하던 관리들의 녹봉 지급 등에 활용한 것이다.

글ㆍ사진Ⅰ한도훈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