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지?’

 

  정확하게 곡우를 맞아 비가 내렸다. 곡우는 양력 4월 20일 곡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이 되는 시기. 곡우가 올 때쯤이면 어김없이 봄비가 내리고 ‘백곡이 윤택한 빚깔을 낸다’고 하였다. 그래서 ‘곡식 곡(雨)에 비 우(雨)자’를 써서 곡우(穀雨)라고 했다.

비오기 전, 부천시 대장동 열평 남짓한 밭뙈기에 고추며 옥수수, 오이, 가지 등을 심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대장동 텃밭에다

고추 모종도 심고 옥수수 모종도 심으러 갔다.

임대한 밭이 목사님 소유라

장애인 친구들이 손에 손을 잡고 밭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일찍 심어놓은 고추, 옥수수에 비료를 주기 위해서였다.

"애걔, 아직 안 자랐네."

땅에다 심으면 바로 바로 크는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땅을 파고 있는 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들은 아직 밭갈이를 하지 않은 곳에다

돗자리 깔고는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우리 거름 주자!"

한 마디에 다들 일어나 비닐로 씌워놓은 모종에다

요소비료를 한수푼씩 듬뿍 주는 것이었다.

내일 비가 온다는데도 떠온 물도 듬뿍 듬뿍 주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밭갈이를 하는

나는 비닐멀칭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저렇게 비료를 많이 주면 어쩌나?

뿌리가 상하지 않을까?

웃자라지 않을까?

괜한 걱정까지 들었다.

이렇게 요소비료도 듬뿍 주고 웃음까지 주고

물도 주고 고랑을 이러저리 헤매더니

"자, 이제 가자!"

한 마디에 손에 손잡고 나비처럼 사뿐히 사라져 갔다.

괭이로 고랑을 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참, 이상한 놈이네."

그 표정으로...

 

곡우에 이어 다음날 아침까지 비가 내렸다. 카메라를 둘러매고 집을 나섰다. 아직 콩나물신문사에는 출근전이고 아침은 일찍 먹은 뒤였다.

초등학교 아이들 등교하는 장면을 찍고 싶었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책마루도서관이 있는 건널목에 다다랐을 때 한 친구가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건널목에 내걸린 신호등에는 ‘6’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산을 쓰지 않고 초록 후드티 모자를 깊게 쓰고 있었다.

신호등 숫자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건널목에서 아이들 등하교를 지도하는 어르신이 ‘행여 멈춰 있는 차가 달려 올까봐’ 신호봉(信號棒)으로 제지를 했다.

약간 숨이 차오른 아이가 골목에 들어서자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약한 비는 내리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그 아이의 뒤를 따랐다. 그 아이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산 같이 쓸까?”

다가가서 물으니 앞서가던 다른 친구가 어느새 곁에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 함께 우산을 썼다.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길을 걸었다.

“왜? 우산을 쓰지 않았어?”

“학교에 너무 늦어서요.”

“너무 늦어서 우산 챙길 시간이 없었구나.”

“네. 학교가 집에서 가까우니까 이 정도 비는 괜찮아요.”

아이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학교 앞에 도달하자 건널목 신호등은 붉은색이었다. 두 아이와 학교에 조금 늦은 한 친구가 신호등 불빛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 옆에 어르신이 신호봉을 들고 안내를 하고 있었다. 또 그 옆에 우비를 입은 어르신 한 분이 빈 수레를 들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서둘러 아이들은 천천히 건너가 교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자 교문 앞에서 교통지도를 하고 있던 경찰관이 ‘무슨 일이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추리닝 차림에 카메라를 매고 나왔으니 그 모습이 가관일 성 싶었다.

 

옛날에 곡우가 되면 볍씨를 가마니에 담아 솔가지로 덮어두곤 했다. 부정한 사람이 이 볍씨를 보게 되면 볍씨의 싹이 잘 트지 않고 한 해 동안의 농사가 망쳐진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솔가지로 덮어놓으면 그 안에서 한해 농사를 결정짓는 벼에서 싹이 돋아났다. 그걸 못자리판에 옮기면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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