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프로젝트 망각과 기억 상영회 후기

 

416프로젝트 망각과 기억 상영회 후기

세월호의 자식들

 

“끄억, 끄억, 어......................억”

어린 것은 두려웠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인간의 울음이라기보단 동물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어미의 숨마저 끊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하는 불안에 어린 것도 울음을 터뜨렸다.

가난한 시골 소작농의 10남매 중 장남은 초등학교 졸업 직후부터 인천의 한 양조장에서 일을 하겠다고 집을 나갔다. 외롭고 배곯는 객지생활을 막걸리와 소주로 버티다 아홉 번째인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간경화로 30여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날 엄마는 마당에 주저앉아 ‘내가 자식 죽인 년’이라며 정신 나간 여자처럼 땅과 본인의 가슴을 치다 쓰러졌다. 아들을 공동묘지에 묻은 후엔 소리 내어 우는 대신 남편과 자식들이 잠든 밤에 소리 죽여 흐느끼셨다. 다락에 숨겨뒀던 아들의 영정사진을 쓰다듬다 때론 본인의 가슴을 쥐어짜기도 하셨다. 엄마 속을 이해 못하는 나는 엄마마저 잃겠다는 두려움으로 모른 척, 잠든 척 그렇게 살았다. 나는 오빠를 땅에 묻었고 엄마는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2016년 4월, 세월호 2주기를 보내며 아이가 다니는 <산어린이집>의 엄마들 5명이 모여 앉았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모임 <문화마실방>을 이끌고 있었다.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는다 했을 때, 몇몇 엄마들은 ‘너무 슬퍼서 아직은 감당할 수가 없어서 책을 못 읽겠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유가족들의 인터뷰 집을 읽고 아픔을 직면하고 응시하는 순간 알지 못할 힘이 생겼고 다들 뭐라도 하고 싶어했다. 그때 계란 (산어린이집에서는 부모의 별칭을 부름)이 속 좋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우리 세월호 관련 다큐 상영회를 열어 볼까요?”

 

6월 2일 저녁, <산학교>의 강당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이, 학생, 교사, 부모들이 빼곡히 모여 앉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는 흐느낌이 있었다. 통곡하듯 우는 엄마도 있었다. <자국 / 도둑 / 교실>이란 세편의 단편을 보는 내내 분노와 슬픔 중 어느 감정이 큰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도언 어머니 말씀대로 ‘가만히 있어라’는 교육은 전혀 바뀔 생각도 없고 유가족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되었다. 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무원 나리님들은 세월호에 있던 일반인들은 ‘눈을 감아도 생생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610일을 자식 잃고 거리의 투사들이 되어버린 유가족 앞에서 3일 간의 청문회를 받다 심경이 뒤틀려 역정을 내는 높은 자리의 공무원님도 계셨다.

나는 대한민국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의 전과 후로 나뉠 거라 여겼다. 상영회가 끝나고 돌아와 보니 오늘도 대한민국은 세월호의 축소판이다. 곳곳에서 우리의 자식들, 즉 세월호의 자식들은 소리없이 쓰러져간다. 아직도 바닷속에, 구의역에, 강남역에, 일터의 현장에서. 유가족들의 ‘안전한 사회’,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핏발 선 외침은 허공에서 맴돌고 있다.

 

죄송스럽지만 유가족 도언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 울음을 삼켜 토해내듯 전하는 말씀에 다시 힘을 얻고 희망을 품어본다.

“끝까지 세월호의 진실을 밝힐 거예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 거예요.”

“끝까지 우리 유가족의 버팀목이 되어 주세요.”

 나는 마음속으로 답하였다.

“당신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저도 끝까지 당신들의 아픔에서 눈을 떼지 않겠습니다

글 | <산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가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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