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若大)의 의미

‘큰 마을’인 약대(若大), 그 역사를 찾아서...

▲ 약대동 주민자치센터 준공식(2002년, 부천시 제공)

약대(若大)의 의미

약대는 한자로 약대(若大)라고 한다. 조선시대 정조 17년에 발간한 호구총수에는 부평부 상오정면에 약대리(若大里)로 되어 있다. 1911년도에 발간한 조선지지자료에도 약대(若大)로 표기해놓고 있다. 한자로 읽으면 ‘같을 약(若), 큰 대(大)’로 읽는다. ‘큰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약대는 안약대와 밧약대로 나눈다. 내리인 내촌(內村)과 도당(陶唐) 마을을 안약대(若大)라고 한다. 두 개의 마을을 포괄하고 있다. 반면에 시우물인 삼정(三井)마을과 약대(若大) 마을을 밧약대라고 했다. 안과 밖이라는 뜻이다.

내리하고 도당마을은 굴포천으로부터 안쪽에 위치해 있고, 시우물과 약대는 굴포천하고 가까운 곳인 바깥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온 것이다.

작고한 최현수 향토역사가가 주도한 부천역사재단에서 펴낸 부천사연구(1992)에서는 “이전에는 약목이라 했으며 이외에도 낙타라고도 했다. 약목이란 것은 우마의 먹이인 거여와 나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풀이했다. 전국에 약목이라는 지명이 있어서 그렇게 풀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천문화원에서 펴낸 부천문화의 재발견에서는 윗풀이에 이어서 이곳에 약물터가 있어 약대라 하던 것을 음이 같은 약대(若大)로 변경되었다고 표기를 하고 있다.

▲ 1970년대 지도

 

'큰 마을'이라는 뜻의 약대(若大)

낙타는 한자로 약대(駱駝)라고 한다. 보통 낙타라고 읽지만 ‘낙타 락(駱)’이 ‘즐거운 락(樂)’으로 변했다가 다시 ‘약 약(藥)’으로 변이를 거친 뒤 두음법칙이 적용되어 약으로 발음이 된 것이다. 뒤의 ‘실을 타(馱)’는 글자 속에 들어 있는 ‘큰 대(大)’의 발음을 따라 읽는 변이형으로 읽는다. 그래서 낙타를 약대로 발음하기도 한다.

왜 여기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사람 사는 마을의 약대를 낙타라고 굳이 붙였는지 그 해명이 된다. 약대를 낙타까지 끌어올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 약대라는 말에서 착안해 억새풀이 많이 자생하여 약대를 사육하였으므로 약대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도 해설하고 있다. 참 어처구니 없는 비약이다. 우리나라에 낙타를 사육한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마을에서 낙타를 사육했다니...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다.

또 다른 해석은 약대의 의미를 ‘거여와 나벌이 많아 지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큰 의미가 없다. ‘거여 목(苜)’은 ‘개자리’라고 불리는 풀이다. 들판에 널려 있던 풀이어서 거름으로나 썼다. 왜 이 개자리를 따서 다리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나 약대 근방에 개자리가 많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그걸 마을 이름으로 따오지는 않았다.

약물터는 우물을 가리킨다. 삼한시대 이전부터 생활에 아주 중요한 우물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약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삼정 우물을 가리키고 이 우물이 약대라는 지명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약대가 삼정, 내촌, 도당까지 포괄하는 지명이어서 ‘신성한 우물이 있는 터’라는 의미에서 약물터가 약대로 변형이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렇지만 약목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약대는 한자로 쓰면 약대(若大)로 같을 약, 큰 대(大)로 풀이하면 ‘큰대(大)와 같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어원풀이를 찾아야 한다. 왜 같을 약(若)자를 썼을까. 이는 땅이름이 처음에는 외자여서 신라 경덕왕 이후 땅이름을 두 글자로 맞추다보니까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약(若)은 큰대와 같다는 뜻이다. 대대를 쓰기가 그래서 약 자를 쓴 것으로 보인다. 이는 땅이름을 한자로 기록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까 약이라는 말도 큰대(大)를 지칭한다.

▲ 아파트로 개발되기 전 단독주택

경북 칠곡군 약목면의 경우를 보면 약목현(若木縣)의 경덕왕 이전 옛지명이 대목현(大木縣)인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원래 대목현(大木縣)이던 것이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계자현(谿子縣)으로 고치고 고려 때에는 약목현(若木縣)으로 고친 것이다. 여기에서 약(若)이 원래 큰대(大)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뒤에 오는 나무 목이 큰(大)였는데 나무 목(木)으로 변형이 된 것이다.

천소용의 고대언어 어휘연구에서 ‘크다’는 말은 고대어에서 ‘한(韓)/한(漢)/한(翰)/한(汗)간(干)/간(馯)’ 등으로 표기되었다. 이 한이 애초에는 으로 발음되었다가 나중에 한으로 바뀌었다. 몽고에서는 징기스칸처럼 칸으로 발음되기도 했다. 한으로 ‘크다’의 의미를 나타낼 때 ‘다(多), 대(大), 성(盛), 일(一)’로 한자표기도 남아 있다. 약대의 큰 대(大)의 어원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약대(若大)는 ‘큰마을’이라는 뜻이다.

▲ 아파트로 개발되기 전 허름한 공장

약대 마을의 현대 역사

약대는 조선시대 삼정, 도당, 내촌과 더불어 상오정면(上吾丁面)에 속해 있었다. 현재의 약대는 원래 밧약대로 불렸던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상하오정면과 주화곶면이 통합되어 약대는 오정면으로 소속되었다.

1973년도 부천시로 승격하면서 김포군 오정면에 편입되었다. 부천시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러다가 1975년에 다시 부천시로 편입되어 신흥동이 되었다. 1982년에 도당과 약대가 신흥1동, 내동, 삼정이 신흥2동으로 분활되었다가 1990년 도당동이 행정동으로 독립을 하면서 약대는 신흥동에 소속되었다.

현재의 약대의 모습은 바다에 접해있던 곳인 시우물, 삼정공단이 자리잡고 있던 곳에 상살미가 자리를 잡고 있어다. 그 곁으로 전적굴이 있고, 전적굴 옆으로 반갑재가 약대에서 중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반갑재는 고갯길이다. 그 반갑재 옆으로 그곳이 물가였음을 말해주는 가천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정주아래, 양사가 포진해 있다. 이는 바다에 접해 있을 때 주로 지어진 땅이름들이다.

내륙으로는 해골동산이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아래로는 원골이 펼쳐져 있었다. 약대와 도당 사이에는 원골에서 흘러내린 개울물과 소개미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합류해서 이뤄진 붕어내가 있었다. 그 하류에는 바닷물이 들어온 압구지라는 나루터가 있다. 나루터 위쪽으로는 조석다리와 얼미다리라는 두 개의 나무다리가 놓여져 도당으로 오가곤 했다. 시우물과는 언덕 너머 바로 이웃사촌이었다.

▲ 약대 옛집

현재는 약대는 행정동인 약대동주민자치센터가 자리를 잡고 있다. 신흥동사무소가 내동 사거리에서 약대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 신흥동사무소는 내동, 삼정동을 포괄하는 사무소 역할을 하고 있다.

약대에는 신흥시장이 있고 신흥시장에서 남쪽으로는 아파트들이 줄이어 서 있다. 약대 마을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 아파트 단지들이 포진해 있다. 마치 거인의 침략처럼 보인다. 도당공단, 삼정공단에 다니는 젊은 부부들이 살고 있는 빌라, 다세대, 단독주택들은 원골 지역에 넓게 퍼져 있다.

▲ 약대 항공사진(2010년, 부천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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