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자(75세)씨

블루베리 전도사에다 농사공동체까지...

국민 노천사

노영자(75세)씨

평생 한(恨)이 되어 대학을 졸업하다

참 아름답다. 인생이...국민 노천사로 불리는 노영자씨. 영락없이 씩씩하고 젊고 재기발랄한 젊음이 넘쳐난다. 인생 칠십에 ‘제2의 인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겹으로 쌍으로 나눠주고 있다. 이런 게 인생이다. 노영자씨 옆에 앉으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미소는 저절로 전염되고 전파된다. 어쩌면 드글드글 끓는 열정으로 인해 온몸이 불타오를지 모르다. 그렇다하더라도 그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그 열정에 자연스레 합류하게 된다.

이렇게 열정이 끓는 인생 후반기를 살아내기까지 고달픔도 많았다. 하지만 그 고달픔은 늘 즐거웁게 일하는 마음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우리 세대는 6.25, 4.19, 5.16을 다 겪었지요. 그때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강해서 여자는 못 배우게 했지요. 그래서 5.16 직후에는 새마을 지도자로 생활을 시작했고, 할아버지가 의사로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맏이여서 그때부터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지요.

아무래도 시골보다는 서울생활이 낫다고 여겨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재건생활학교에서 양재교육과정으로 편물과 양재기술을 배웠습니다. 당시에는 양재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기술로 양장점을 차렸습니다. 기술로 동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고 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경찰이었지만 건강이 안 좋았지요. 병원비가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집안이 늘 쪼들렸지요.”

노영자씨는 동생들 뒷바라지에 청춘을 다 보냈다. 동생들이 다 커서 분가하고 독립하면서 배움에 대한 한(恨)이 더욱 커졌다. 평생 한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학교에 가자!’ 라고...이리저리 학교를 알아보니까 수도여고가 나이제한이 없었다. 2005년 나이 64세에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했다. 당시 나이 많은 어머니는 샌프란시스코 남동생에게 보냈다. 평생 함께 한 어머니였다. 어머니도 흔쾌히 공부하는 길에 동의를 한 것이다.

▲ 어머님과 함께 한 시간

“수도여고에서 3학년을 다닌 뒤 고민을 했습니다. 대학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때, 1학년만 다니다가 그만두어도 소원이 없겠다고 해서 08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에 들어가 4년동안에 장학금을 세 번이나 탔습니다. 졸업할 때는 총장상도 탔지요. 대학원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영어가 딸려서 못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영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가 박사학위까지 따려구요.”

 

노영자씨는 농학과를 졸업 한 뒤 ‘블루베리 전도사’가 되었다. 도시생활을 하면서 안면을 익힌 이가 옥상이나 텃밭에 블루베리를 심는다면 어디든지 달려가 지도해주고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블루베리는 추위에도 강해 겨울에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고 야외에 그냥 두어도 되기 때문에 많이 권한다. 오히려 야외에 두어야 다음 해에 블루베리 열매가 잘 열린다.

“대학 졸업 논문도 블루베리로 썼어요. 블루베리가 아침 저녁으로 주스를 만들어 먹으면 시력이 좋아진다고 해서 실험도 했습니다. 아는 동생이 평생 안경을 쓰고 살았지요. 그 동생에게 블루베리를 아침 저녁으로 먹게 했더니...세상에 기적이 일어났어요. 그 동생 시력이 좋아져 안경을 벗은 거에요. 블루베리는 세계 10대 과일에 뽑힐 만큼 좋습니다. 누구나 쉽게 화분에다 심을 수 있고, 기를 수 있습니다. 특히 도시 자투리 공간에 심어두면 많은 양은 아니지만 자신의 건강을 지켜줄 수 있는 블루베리는 수확할 수 있습니다.”

노영자씨는 농학과를 졸업한 뒤에도 농업관련 수업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배우고 있다. 부천시에서 연 도시농업 교육 제2기생으로 1년동안 배웠다. 부천식물원에서 수업을 했는데 1년동안 함께 농사 실습을 하면서 도시 농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도시농업은 젊은 사람들에겐 정말 소중한 경험입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농사라는 것을 전혀 모르지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지어보지 않아서 처음 배우는 거라 설레는 마음으로 배웠습니다. 아이들에게 새싹이 자라는 것을 보여주면 아이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자연의 소중함을 몸으로 체득하게 되는 거지요. 이렇게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도시농업이 정말 소중하지요.”

 

건강은 자신이 지켜야

노영자씨는 나이가 먹으니까 자연스럽게 먹거리에 관심이 가더라고 했다. 먹거리가 우리네 인생에 있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예전 한때 건강이 안 좋아서 절에서 2년 정도 수양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큰스님으로부터 지압이며 간단한 침술을 배웠다. 자기 몸을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그때 생겼다.

“내년에는 까치울에 100평 정도 얻어서 젊은 친구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볼 생각입니다. 토종씨앗 살리기 운동 차원에서 우리네 토종 씨앗도 심고, 약초도 심을 것입니다. 농막도 지어서 농사를 짓는 틈틈이 쉬기도 하고, 그곳에서 함께 농사를 짓는 젊은이들과 토론도 할 것입니다. 일종의 도시텃밭 공동체를 꾸려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현재 약초 공부에 열의를 다하고 있습니다. 부천식물원에서 연 약초 강의에 푹 빠져 지내고 있지요.”

노영자씨는 집안 내력이 심장이 안 좋았다고 했다. 아버지도 협심증이 있고, 동생들도 협심증이 있다고 했다. 물론 본인도 협심증이 있어서 늘 고민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심장약으로 조절을 했지만 어느 날인가 쑥이 좋다는 말을 듣고 바로 실천에 옮겼다. 농약을 치지 않은 밭에서 쑥을 채취해 말려 놓았다가 말린 무화과 몇 개 넣고 쑥차로 끓여 먹었다. 거기에다 몸이 안 좋다고 느껴질 때는 늘 쑥뜸을 떴다.

“제가 고기도 안 먹고 된장찌개만 먹는데 고지혈증에다 심장병이 있어요. 이 쑥으로 차도 마시고 쑥뜸을 떴더니 고지혈증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장기 복용은 좋지 않다고 해서 1-2개월 먹다가 다른 차를 마셨지요. 그렇게 반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하다고 여기는 쑥이 참 좋지요.”

 

사진 촬영도 50년 넘게 해와

노영자씨는 틈만 나면 셔터를 눌러댄다. 수많은 사진을 찍어오고 있다. 그 사진찍기가 무려 50년이다. 자신이 찍히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찍는 것은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흑백 사진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대학 때에는 제가 늘 사진을 찍어 카페에도 올리고 동기들에게 나눠주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동기들, 선후배들이 ”언니, 남은 건 사진밖에 없네요.”라고 말해주었어요. 그 친구들이 제 별명을 지었는데, ‘국민 노천사’입니다. 사진도 찍어주고 어지간한 일들은 군말없이 해주는 성격이라 그렇게 부른 거지요.

사진찍기에 몰두 하다 사진기를 잃어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그때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제 동생들이 카메라를 사주었지요.”

노영자씨는 아직도 배움에 목말라 하고 있다. 더 많이 배워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다. 시골에다 땅을 천평이나 이천평 쯤 사서 약초도 기르고 먹거리도 길러서 몸이 아픈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자신의 건강을 되찾아가는 그런 집을 짓고 싶은 것이다. 치료 행위를 하면 법으로 규제를 하기 때문에 너무나 좋은 민간요법으로 자신의 건강을 되찾아가면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취업난에 휘둘리는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학만을 목표로 하지 말고 한가지 기술이라도 배우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한분야를 오래 경험하다 보면 전문 최고기술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자신이 늦게서야 농학과를 졸업하고 난 뒤 농사기술을 전파하는 전도사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거기에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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