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년 어르신의 약대 이야기

가발공장, 경인고속도로 공사...

여러 공장들을 다니면서 약대에 정이 듬뿍...

김학년 어르신의 약대 이야기

 

 약대 대우실업 가발공장에서 일해

 약대에 살고 있는 김학년(金學年) 어르신은 77세이다. 1967년부터 약대에서 살아오고 있다. 약대 이외에는 별로 가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약대로 이사와서는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일만 열심히 했다고 토로 했다.

“이사왔을 때 약대는 다 논밭이었어요. 붉은 황토땅 이었지요. 공장은 도당동 태양공구상가에 있던 태양연와공업(주)와 동부간선수로의 퉁퉁다리 건너 우신연와(주)만이 있었어요. 저희 집 아저씨가 뜨거운 벽돌을 끄집어내는 일을 며칠 하다가 그만 두었어요. 일을 해보지 않아 그런 거지요. 학교 교사생활, 군대에서 군인으로 살아와서 노동일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약대에 와선 의지할 데가 없어서 힘들게 살았어요.”

이때 김학년 어르신은 대우실업이라는 가발 공장에 취업을 했다. 당시 가발 공장은 여공들의 취업 일순위였다. 동네 골목에서 엿장수들의 ‘고장 난 시계나 머리카락 삽니다’라는 외침을 듣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수집된 머리카락들은 가발공장에 팔려나갔다.

한국 여성들의 뛰어난 솜씨로 개발된 다양한 상품의 가발이 미국으로 수출됐다. 전국에 걸쳐 가발공장이 수백 개에 달했으며 가발공장 여공 수는 2만 명을 넘었다.

“현재 두산위브트레지움 자리에 공장이 있었어요. 한쪽에는 봉제공장이 있었지요. 얇은 나일론 천을 잘라서 팬티를 만들었어요. 다른 쪽에선 가발공장을 한 거지요. 전 가발공장에 다녔어요.

처음 재료가 되는 머리카락이 들어오면 혼모반에서 받아요. 원사를 가지런히 펴서 자르는 작업을 하는 곳이었지요. 긴 머리 가발인지, 짧은 머리 가발인지를 구분하여 재단을 하는 곳이지요. 재단이 된 원사는 컬반으로 갑니다. 생머리 가발도 있지만 파마를 한 가발도 있어요. 컬반은 파마를 하는 작업을 하지요. 저는 이 컬반에서 일을 했습니다. 통에다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서 건조기에 말리면 꼬불꼬불하게 파마가 된 머리카락이 되었어요.

다음 공정은 포스트반과 수제반으로 나눠졌어요. 포스트반은 재봉틀로 머리카락을 심는 공정이지요. 수제반은 고무로 된 캡에 한 올 한 올 수를 놓듯 심는 작업을 하지요. 마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심었어요. 이걸 제모한다고 했지요.

두피의 역할을 하는 모자에 머리카락을 씌우고 나면 완성반으로 넘어갔어요. 여기서 빗으로 가발의 머리카락을 빗는 작업을 했지요.

가발공장에선 각양각색의 칼라 가발도 만들었어요. 산타크로스의 길고 흰 수염도 만들었지요.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었어요. 그런데 야간도 하고 휴일에도 일을 했지만 야간수당이나 휴일 특근 수당 같은 것은 아예 없었어요.”

▲ 1960년대 가발공장 전경

솔밭 아래 길에선 도깨비, 귀신들이 나와

이때 약대의 모습은 묵밭 천지였다. 묵밭은 밭으로 일구지 못해 풀만 무성하게 자라는 곳을 말한다. 약대초등학교 근방에 묵밭이 많았다. 황토묵밭이어서 비만 오면 황토흙이 신발에 달라붙었다. 약대, 시우물 근방이 온통 황토흙이었다. 그래서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왔다.

그때 땅값이 한 평당 10원에서 3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서 황금땅으로 변해버렸지만...

약대초등학교 근방에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솔밭이 있었다. 그 솔밭 사이에 드문드문 묘들이 있었다.

현재 다니엘병원 앞쪽에 원불교부천지부가 있었다. 이곳에도 솔밭으로 이루어진 동산이 있었다. 해골동산이었다. 그때는 해골동산이라는 이름도 알지 못했다.

“솔밭 아래로 길이 있었어요. 반갑재라고 부른다지만 그때는 그 고갯길 이름을 몰랐어요. 그 길은 기(氣)가 세서 사람들이 잘 다니질 못했어요. 한낮에도 도깨비나 귀신이 나온다고 했지요. 지금은 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사람들이 다니는데도 아무런 탈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때는 참 무서웠지요.

약대 수돗길 건너편은 넘말이라고 했어요. 약대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지요. 정주마을이자 살말인데... 약대경로당이 있던 곳은 마루테기라고 불렀어요. 동네가 아주 높아서 그런 거지요. 현재는 아래쪽에 살말공원이 있어요.

약대초등학교 쪽은 원골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원골은 골짜기였지만 물은 거의 없었어요.”

동부간선수로가 지나는 둑을 간선둑이라고도 하고 데부둑이라고 했다. 그 수로를 건너는 다리를 퉁퉁다리라고 불렀다. 그 다리 앞에 김포선 기차가 다녔다. 철로가 있었지만 간이역은 보질 못했다고 했다. 데부둑에 벼를 심기도 했다. 아주 먼데까지 벼를 심어서 수확했다. 장마 때는 흙탕물이 데부둑을 넘어가 논에 베어놓은 수많은 볏단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부천은 항상 수해에 시달려야 했다.

김학년 어르신은 모내기철에 열심히 남의 모를 심었다고 했다. 낯선 약대에서 악착같이 살아갈 길은 그것뿐이었다.

“원불교부천지부 아래에서 살았어요. 모심는 것은 전곡에서 살 때 배웠지요. 그래서 모심기 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지요. 일당으로 나가면 돈이 얼마 되지 않아 우께도리를 했지요. 우께도리는 한 논이나 여러 논을 맡아서 모를 심어주면 그 대가를 받는 거지요. 동네분들하고 함께 했는데... 새벽같이 모를 찌고 와서 아침을 먹었어요. 그 다음 허리 펼 사이도 없이 모를 심고는 번개같이 점심을 먹었지요. 돈 벌 욕심에 저녁 늦게까지 모를 심었어요. 어깨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요. 그렇게 보름이상 모를 심으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어요.”

 

경인고속도로 공사에도 참여해

김학년 어르신은 돈벌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인고속도로 공사 때는 도로에 자갈이며 모래 까는 일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고속도로인데 부천 구간에서 일을 했다.

“경인고속도로를 지나칠 때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그때가 40대 초반이었던가. 그랬어요. 고속도로 공사에서 막노동을 했지요. 불도저가 도로를 높이고 평평하게 다져 놓으면 트럭이 자갈을 부어 놓았어요.

그러면 우리들이 삼태기에 자갈을 퍼 담아서는 도로에 뿌려 놓아요. 그렇게 자갈을 골고루 뿌려놓으면 무거운 롤러가 꾹꾹 다졌어요. 자갈공사가 끝나면 이번에는 모래를 삼태기에 담아서는 뿌렸지요. 그 위에 롤러가 다지구요.

이 같은 작업을 모두 마치면 타마구를 뿌렸어요. 지금의 아스팔트하고 달라요. 타마구는 아스팔트 찌꺼기를 코팅한 종이라고 했어요. 그 타마구를 뿌리고 난 뒤 그 위에 시커먼 기름을 뿌렸지요. 경인고속도로 공사 때는 돈 좀 벌었지요. 그런데 그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약대에서 경인고속도로 공사 현장까지 걸어가기도 하고 현장 감독의 트럭 뒤에 타고 가기도 했다. 시우물이 가까이에 있었지만 이렇게 도로 위에서만 보았지 정작 마을 안으로는 들어가 본적이 별로 없었다.

날마다 일밖에 몰랐다. 복숭아 철에는 깊은구지 언덕 복숭아밭으로 뻔질나게 일하러 다녔다. 복숭아에 봉지 씌우는 작업을 했다.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 들고 버스비가 아까워 걸어다녔다. 이때 포도마을 들판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택하면 시간을 조금 줄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포도마을엔 포도를 많이 키웠다.

“복숭아가 익어갈 무렵에 태풍이 불면 우수수 떨어졌지요. 그러면 그걸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싸게 팔았어요. 함지박에 복숭아를 사서는 이고 소사에서 약대까지 걸어왔지요. 당시에는 소사복숭아를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덜 익은 복숭아는 물에다 담근 다음 사카린을 뿌려놓고 이틀 정도 있으면 달고 맛있게 변했어요. 뜨뜻하게 해주면 더 맛있었지요. 아이들은 그걸 맛있다고 잘 먹었지요. 지금은 덜 익은 복숭아는 줘도 안 먹지만...”

당시는 부천시가 소사읍이었다. 인구도 별로 많지 않은 시절이고 공장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면서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김학년 어르신은 이 공장, 저 공장 안 다녀본 공장이 없을 정도로 많이 다녔다. 유리공장, 그릇공장 등을 다니면서 약대에 정이 듬뿍 들었다.

 글 | 한도훈 조합원

▲ 약대 주민들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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