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남매 모두 공장 사장으로 키우고...

약대 농장마을,은행나무 목숨도 살리고

4남매 모두 공장 사장으로 키우고...

 

 약대 농장마을 여경로당 김 갑 순 회장

약대 농장마을, 은행나무 목숨 건져

약대에 김갑순 어르신이 있다. 약대 농장마을 여경로당 회장이다. 부천시 그라운드골프연합회 이사까지 역임하고 있다. 늦은 나이지만 혈기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약대 농장마을 경로당 앞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가을 빛이 받아 노랗게 물이 들어가는 중이다. 생명의 약동이 넘친다.

그런데 이게 농장마을이 아파트단지로 개발되면서 자칫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 길을 넓히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무려 백 삼십년이 넘는 은행나무인데... 저 세상으로 한 번 가면 그저 기억 속에서만 맴돌 뿐...지금 은행나무가 살아 있으므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은행나무 입장에서 ‘앞으로 천년만년 잘 살겠습니다’라며 다짐 맹세라도 해야 한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목숨을 건졌으므로...

“여기 도로가 원래 4m인데 6m로 확장했지요. 그런데 은행나무가 도로 확장하는데 방해 된다고 해서 베야한다고 했어요. 은행나무 나이가 백 삽십년 쯤 됐어요. 나이 많이 먹었지요. 은행나무 벤다고 돼지고기 한 근 사가지고 막걸리 좀 잔에 따라서 놔달라고 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못 베겠더라구요.

제가 회장이니까 나더러 베래요. 제가 막걸리를 따라 놓고 그렇게 뭉기적거리니까 경로당 총무가 은행나무를 벤다고 왔어요. 3시에... 그래서 제가 “이봐요. 여기가 장수 마을인데... 총무님 마음대로 하셔요. 난 못 베겠습니다. 어디가 물어보니까 미신 지키는 게 아니라 은행나무 베면 액상이 많이 난다고 그러니까 책임지세요.” 그랬지 뭐에요. 젊은 사람 다 죽는다고 거짓말을 했지요.

“총무가 책임질거면 하고 난 못해.” 그랬더니 가만히 섰더라고요. 장비는 가져오라고 해 놓고... 못 베겠습니다. 아 총무도 그러는 겁니다. 딱 좋지 뭐에요. 어르신이 말리니까 못 베겠습니다. 그렇게 된 거지요. 액상이 많이 난다고 책임지라고 각서 쓰라고 해서 썼지요.”

김갑순 여사의 기지로 은행나무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목숨 살려놓고 보니까 다른 게 문제가 되었다. 태풍 불고 쓰러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은행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는데 태풍 때 쓰러지면 모든 것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무 지지대를 해달라고 요구해서 지지대를 했다.

“은행나무 지지대를 해 놨는데 암만 해도 의심스러워서 구청에다가 전화를 했지요. “여기 은행나무 지지대가 잘 되었는지 감정하려고 하니 감정사를 보내 주세요.” 라고 했지요. 정말 기술자 5명을 보냈어요. “이거 감정해 주세요. 이거 태풍 불면 쓰러지게 생겼는데...” 기술자들이 은행나무 지지대를 점검하더니 괜찮다고 했어요. 그때 각서를 받아 놓을 걸 그랬어요. 그것을 못 받아 논 게 마음에 걸려요.

여기 경로당 회원 한 분이 가을에 은행 딴다고 술 먹고 올라갔어요. 올라가다가 땅바닥에 딱 떨어졌는데, 땅바닥에 피가 흥건하고 그랬지요. 바로 병원에 실려갔어요.

그 분이 병원으로 실려간 동안에 동네사람들이 저 보고 ‘저 아줌마가 베지 말라고 해서 사람 죽었다’고 하면 어떡해요.

그날 저녁에 은행나무 앞에서 마주보고 서서 얼마나 울었던지... “은행나무야. 백년이 넘게 살았는데 말을 못해서 그렇지, 네가 갖고 있는 직감이 있을 거 아니냐. 사람 살려주라. 한 삼년만 살게 해주면 얼마나 좋으까. 나 욕 안 먹게.. 은행나무야 니 목숨, 나 때문에 안 죽은 거 아니냐.” 그렇게 하소연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혼자서... 소문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아무소리도 못하고 와전될까봐... 그랬는데 은행나무에 떨어진 분이 오년 살다 죽었어요. 정말로 5년 살다 죽었어요.”

김갑순 여사는 은행나무 살리면서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그렇게 은행나무도 살고, 은행나무에 올랐던 분도 오년을 더 살았다. 다 마음속으로 기도했던 덕분이라고 했다.

 

약대에서 벼농사 지어

김갑순 여사가 약대에 진출한 것은 지금 보다 혈기가 더 창창할 나이인 40대 였다. 약대에 와서 무작정 농사부터 지었다.

“사십 되었어도 롱스커트 째진 거 입고 파진 거 입고 그랬지요. 그러니까 어떤 처녀가 ‘약대 동네 큰일 났다’고 ‘만만치 않은 여자가 들어와서 할아버지들 돈 다 뺐게 생겼다’고 소리소리 질렀지요.

그래서 그때 싸울게 아니라 내가 모범을 보이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발 걷고 슬리퍼 신고 돌아다녔지요.

그때 한 분이 오셔서 “뭐하시는 분이에요” 물었지요. 그러니까 농사짓는데요. 그래서 성함을 물어보니까 저하고 동성동본이었어요. 우리가 무남동파 신라 경순왕 자손이지요. 그 분 도움을 얻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택시타고 나가서 일꾼들 사서 농사를 지었지요. 3월달부터 지었어요. 80마지기 농사지었지요. 점점 늘어서 일년에 360~370 가마씩 지었지요.”

김갑순 여사는 약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피곤한 줄 모르고 살았다. 그저 쌀농사를 억척스레 지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자신은 농사가 뭔지도 몰랐다. 그저 여자가 무슨 농사짓느냐고 비웃을 까봐 논에 피 하나도 없이 뽑아내면서 깨끗하게 지었다.

오토바이에다가 비료 싣고 가서 뿌렸다. 바람결에 덜 가는 데가 없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주었다. 그렇게 약대에서 최고로 농사를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났다. 그렇게 농사를 지어 4남매 혼자 다 길러서 대학까지 모두 졸업시켰다.

“얘들이 지금은 다 사장들이에요. 난 일본서 초등학교 다니다가 2학년 때 해방이 되어 가지고 고것마저 제대로 못 배웠지요. 10살에 들어가서 16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에 중학교에 가니까 6.25사변이 났지요. 그래서 공부를 하나도 못했어요. 그래도 애들이 공장 사장하고 있어요. 우리 막내딸도 7살 먹도록 젖 먹이고, 10살 먹도록 포대기 해서 엎고 다니고 해서 길렀는데...”

 

경로당 화장실 에피소드

약대 농장마을 경로당을 지을 때였다. 그런데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안 해주고 옛날 푸세식으로 만들어 준 거였다. 그때, 동장이 경로당에 와서 둘러보다가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화장실 문을 막고 버티었다.

“동장님, 왜 이거 수세식 안 해주고 그러세요. 화장실 안에서 똥내 맡으니까 좋아요? 오늘 결론안 지으면 문 못 열어드려요. 하루종일 이렇게 있을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러니까 동장님이 “제가 나가서 생각해 볼께요” 그래요. “안 돼요. 생각해 보는 거는 안 돼요. 여기서 꼭 결론 지으세요.” 동장이 보니까 죽어도 문을 안 열게 생겼거든... 이 여자가... 그러니까 “예. 해드리겠습니다”. “아, 이거 구두상이라 안 되요.” 증거가 있어야지 말로해서 없었던 걸로 하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여직원에게 “이리로 오세요.”라고 했더니 왔어요. “동장님 빨리 말하세요. 증인으로 예 해드리겠습니다.” “분명히 들었지요.” “예” 그때 동장님이 들어있는 화장실 문을 열어 줘서 수세식 공사가 시작되었어요.”

김갑순 여사의 완강한 주장으로 정화조를 부천에서 제일 큰 걸로 묻게 했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땅을 파야 해서 지게로 몇날 몇일 동안 져 날라야 했다. 그렇게 수세식 화장실 하나 만들 때 동에서 와서 사진도 찍어갔다. 그럴 때마다 국수 삶아 주고, 커피 끓여 주고, 막걸리 사다주고 그랬다.

그랬더니 동사무소에서 너무 노력 많이 한다고 해서 표창을 상신해서 타게 되었다.

그렇게 동네일에는 발벗고 나서지 않은 게 없다. 마당발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손 한 번 벌리지 않는다. 그게 김갑순 여사의 신조이다.

김갑순 여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더 많은데...지면이 너무 야속하다.

글 | 한도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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