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마을의 역사를 보았을 터

대장마을 삼백오십살 먹은 들메나무

대장마을의 역사를 보았을 터

 

◆ 대장마을엔 들메나무가 있다

대장마을 산등성이 맨 꼭대기에 우람한 들메나무가 서 있다. 부천에선 유일한 들메나무이다. 천년 된 은행나무, 팔백년 된 느티나무 등이 있지만 들메나무가 오래된 것은 대장마을이 유일하다.

대장마루에 우뚝 선 들메나이는 삼백오십여년 정도로 추정한다. 그러니까 무려 삼백오십여년 동안 대장마루에서 부천을 굽어보며 서 있었다는 얘기다. 온갖 풍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을 터이지만 계양산에서 몰려오는 바람결에 묻어 두었다.

서해조수가 밀려들어오고 거기에다 장마까지 겹쳐서 굴포천을 거쳐 고리울내까지 범람할 때면 대장들판이 그야말로 바다 가까운 모습으로 변한 모을 지켜보았을 터이다. 대장마을 집 가까이, 섬말 마을 집 가까이 물이 들어차면 대장마루나 섬말의 동그랑재로 올라가 발을 동동 굴렀으리라.

그때에는 대장마을 앞을 거쳐 한다리까지 가던 길도 물 속에 잠겨 버렸을 것이다. 오로지 대장마을과 섬말이 마치 외롭고 외로운 섬처럼 우뚝 솟아 있었을 것이다. 발 아래까지 차오른 물소리를 들으며 대장마을 사람들이 수해를 피해 들메나무 아래에 모여 근심 걱정하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먼 놈의 비가 석달 여흘이나 내린대여?”

“그러게 말이여. 하늘도 무심하지. 아이고, 대장마을 전체가 굶어죽으라는 팔자인가 보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이 맑아지고, 그 많던 물도 쑥 빠져 나가면 대장마을 사람들을 그제야 살 것 같아 함성을 질렀을 것이다.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에게 치성을 드리세.”

대장마을 사람들이 모여 도당제를 지내고 했을 터이다. 향나무는 도당할머니, 들메나무는 도당할아버지 역학을 톡톡히 해냈다. 이들 나무를 돌아가며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 들메나무가 눈 앞에 있다. 지금은 대장들판에 억수로 비가 쏟아져도 바로 굴포천으로 빠져버린다. 수시로 대장들판을 덮쳤던 수해를 입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좋은 세상을 살고 있는 셈이다.

 

◆ 들메나무 껍질은 신들메로 사용

대장마루 들메나무가 대장마을에 오게 된 사연은 아무도 모른다. 바람결에 씨앗이 실려와 황토흙 좋은 자리를 차지하며 발아(發芽)했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주머니에 들메나무 씨앗을 가지고 다니다가 얼떨결에 떨어뜨려 놓았을까? 아니면 대장마을 반남박씨 박시온 대장마을 입향조께서 들메나무 모종을 얻어다가 심었을까?

박시온 입향조가 대장마을에 정착한 해가 2016년부터 셈하면 삼백육십여년 되었으니까 들메나무 나이와 얼추 맞아 떨어진다. 그러고 보면 박시온 입향조가 대장마을에 들어와 대장마루에 향나무와 들메나무를 심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성 싶은데... 그때부터 이들 나무들을 보살피고 키워서 도당나무로 성장했을 것 같은데... 대장마을 사람들이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우고 보호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땔나무가 없다고 해도 도당나무인 들메나무를 베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들메나무를 베었다가는 동티가 나서 즉사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강했을 터이므로 지금까지 생존을 해오고 있을 것이다. 도당나무이기에 삼백오십 여년을 꿋꿋이 푸른잎을 펼쳐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들메나무의 껍질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신고 다니던 신발인 짚신을 단단히 동여맬 때 쓰였다. 들메나무 껍질은 질기고 단단해서 얇고 길게 벗겨졌다. 그러기에 짚신을 신을 때는 필수적으로 썼다. 대장마을 사람들도 짚신을 신었을 터이고, 짚신을 단단히 붙들어 매려면 들메나무 껍질이 필요했을 터인데도 들메나무가 멀쩡한 것은 도당나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곁들어서 들메나무의 어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들이 들판을 가리키고, 메는 산을 가리키므로 ‘들판과 산’의 이름이다. 산이나 들판에서 잘 자라는 나무라는 뜻이다.

짚신 신발을 묶은 것을 들메라고 하는데 들메나무 유래가 여기에 있다. 신들메는 먼 길을 걸을 때 짚신이 벗겨지지 않도록 동여매는 끈을 가리킨다. 짚신을 신고 끈을 묶으면 땅바닥에 닿아 쉽게 닳아졌다. 노끈이나 짚으로 묶은 것은 금방 닳아서 끊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짚신은 강하고 단단한 끈으로 묶어야 했다. 오래도록 신들메를 고쳐 신지 않아도 되니까 들메나무 껍질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짚신 신고 먼 길을 걸어다니던 시절이었다. 남도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거나 일가친척(一家親戚)을 보러 가더라도 제일 먼저 짚신을 단단하게 묶을 신들메에 신경을 썼다. 짚신이 원래 발 사이즈에 맞춰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들 헐렁하게 신어야 했다. 그렇게 헐렁한 채로 걷다가는 오리도 채 걷지 못해서 발이 퉁퉁 붓는 발병이 날 공산이 컸다. 그러기에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신들메를 잘 동여매야 했다. 산길을 걷거나 들길을 걸을 때에도 신들메가 풀어지면 매번 허리를 굽혀 고쳐매야 했다.

짚신을 신고 걷는 것조차 힘겨웠던 시절에 들메나무는 보배롭고 은혜로운 나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조차 들메라고 지었을 것인가. 아니면 들메나무라는 말이 생기고 난 뒤 신발끈을 신들메로 하였던가. 우리나라 자생식물 이름을 집성(集成)한 책인 '조선식물향명집(1937)'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 들메나무를 자주 애용한 백석 시인

대장 들메나무 아래에 서서 위대한 시인 백석을 떠올린다. 백석의 고향인 평양북도 정주에는 들메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늘 들메나무와 함께하는 생활이었다. 백석의 시에도, 백석의 수필에도 들메나무가 등장한다.

백석의 동시인 ‘까치와 물까치’에는 까치가 높다란 들메나무의 맨 꼭대기에 집을 지었다면서 자랑한다.

 

깍깍 깍깍깍 까치 말이

내 집은 높다란 들메 나무

맨맨 꼭대기에 지었단다.

 

삐삐 삐리리 물까치 말이

내집은 바다우 머나 먼 섬

낭떠러지 끝에 지었단다.

---부분 인용--

 

백석의 수필 '당나귀'에 들메나무가 등장한다. 1942년 8월에 '매신사진순보(每新寫眞旬報)'에 실린 수필이다. 마을 대장간에 들메나무가 심어져 있다.

당나귀

                                                                                               백석

날은 밝고 바람은 따사한 어느 아침날 마을에는 집집이 개들 짖고 행길에는 한물컨이 아이들이 달리고 이리하야 조용하든 마을은 갑자기 흥성걸이었다.

이 아침 마을어귀의 다 낡은 대장간에 그 마당귀까지 짖는 마른 들메나무 아래 어떤 길손이 하나 있었다. 길손은 긴 귀와 껌언 눈과 짧은 네 다리를 하고 있어서 조릅하니 신을 신기우고 있었다.

조용하니 그 발에 모양이 자못 손바닥과 같은 검푸른 쇠자박을 대의고 있었다.

그는 어늬 고장으로부터 오는 마음이 하도 조용한 손이든가. 싸리단을 나려놓고 갈기에 즉닙새를 날리는 그는 어늬 산골로부터 오는 손이든가. 그는 어늬 먼 산골 가난하나 평안한 집 훤하니 먼동이 터오는 으스스하니 추운 외양간에서 조짚에 푸른콩을 삶어먹고 오는 길이든가. 그는 안개 어린 멀고 가까운 산과 내에 동네방네 뻐꾸기 소리 닭의 소리를 느껴웁게 들으며 오는 길이든가.

마른 나무에 사지를 동여매이고 그 발바닥에 아픈 못을 들여 백끼우면서도 천연하야 움직이지 않고 아이들이 돌을 던지고 어른들이 비웃음과 욕사설을 퍼부어도 점잔하야 어지러히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가엽시 여기며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다 허물하거나 탓하지 않으며 다만 홀로 널따란 비인 벌판에 있듯이 쓸쓸하나 그러나 그 마음에 무엇에 넉넉하니 차 있는 이 손은 이 아침 싸리단을 팔어 양식을 사려고 먼 장으로 가는 것이었다.

날은 맑고 바람은 따사한 이 아츰날 길손은 또 새로히 욕된 신을 신고 다시 싸리단을 짊어지고 예대로 조용히 마을을 나서서 다리를 건너서 벌에서는 종달새도 일구고 늪에서는 오리 떼도 날리며 홀로 제 꿈과 팔자를 즐기는 듯이 또 설어하는 듯이 그는 타박타박 아즈랑이 낀 먼 행길에 작어저 갔다.

 

◆ 들메골, 들메나무마을도 있다

북한 지역엔 들메나무와 얽힌 땅이름들이 많다. 들메나무골은 평양시 순안구역 산양리 강촌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대장마을 들메나무처럼 도당 제사를 지내던 산당이 있었다.

아예 들메나무마을도 있다. 평안북도 동림군 신곡노동자구에 있는 동단마을이다. 천연기념물인 오백년이나 나이가 먹은 동림들메나무가 있어 들메나무마을이라고 부른다.

들메골은 참 많다. 들메나무가 있는 마을이나 골짜기를 가리킨다. 오래된 들메나무가 있어 이를 특징으로 삼아 이름을 지은 것이다. 들메나무가 땅이름을 짓게 만든 요소가 된 것이다.

들메벌도 있다. 황해북도 황주군 고연리에 있는 벌판이다. 벌판에 들메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붙여졌다. 들메나무샘도 있는데, 샘가에 들메나무가 있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 샘말 앞에 있는 샘터이다.

남한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이 먹은 들메나무는 없다. 대장마을 들메나무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그러기에 대장마을 들메나무는 너무도 소중하다.

동계올림픽을 위한 슬로프를 만들기 위해 가리왕산에 있던 팔십여살 먹은 들메나무는 싹뚝 잘려나갔다. 이처럼 들메나무는 쓸모없는 잡목 취급을 받았다. 수많은 들메나무가 산림을 가꾼다는 명목에서 잘려지고 사라졌다. 들메나무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고 벌목을 해댄 탓이 크다.

들메나무가 병을 치료하는 한약재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알면 이렇게 무자비하게 잘라내지는 않을 것이다. 들메나무는 간질, 생기, 안질, 출혈, 풍습, 해열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한약재로 들메나무의 뿌리는 수곡류피(水曲柳皮)이라고 하고, 이질에 쓰이고 창독(瘡毒)을 제거한다고 한다.

김춘수 시인의 ‘먼 들메나무’라는 시가 생각난다. 그 시에는 들메나무가 온통 슬픔에 차 있는 나무로 묘사된다. 아마도 물푸레나무를 닮아 그런 모양이다. 푸른색이 슬픔을 자아내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물푸레나무하고 사촌이다.

들메나무를 가리켜 들매나무, 떡물푸레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예 물푸레나무하고 접목되어 잡종이 탄생했는데, 물들메나무라고 한다. 지리들메나무, 물푸레들메나무라고도 한다.

 

 먼 들메나무

                    김춘수

슬픔은 슬픔이란 말에 겨워

숨차다.

슬픔은 언제 마음 놓고

슬픔이 되나.

해가 지고 더딘 밤이 오면 간혹

슬픔은 별이 된다.

그새 허파의 바람도 빼고 귀도 씻으며

슬쩍슬쩍 몰래 늙어간

산모퉁이 머쓱한

그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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