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제』 만화가의 인생이야기 두번째

『조관제』 만화가의 인생이야기 두번째

‘한국만화영상진흥원’유치에 큰 힘을 보태...

 

 

◆ 부천에서 새로운 생활 시작

조관제 만화가는 KBS 문화사업단 출판부에서 근무를 하면서도 낮에는 직장생활을, 밤에는 신문과 주간지, 회사보에 들어 갈 만화와 일러스트를 그리는 투잡 생활을 했다. 어느 정도 생계에 안정을 찾았을 때 본격적으로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리지 못하고, 높은 원고료 유혹에 못이겨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리지 못한 것이 살짝 후회를 한다.

서울 금호동에서 암사동으로 전전하던 그는 형편에 맞는 집을 찾으러 헤매다가 부천 역곡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조관제 만화가는 부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신철영 선생하고, 지금은 정치인인 신종철씨 등을 알게 되었다. 주로 부천에서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시민운동 하는 분들의 힘이 센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참으로 고생스런 일을 하고 계시더군요. 만화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그들에게 서울과 인천 사이 베드 타운 부천에 형편이 되면 조그만 만화 갤러리를 만들자고 자주 이야기 했어요. 거기에서 만화가들이 늘 있고, 만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을 전시도 하고, 작품판매도 하는 그런 만화 갤러리, 만화가들의 놀이터를 만들고 싶었지요.

그때 제가 KBS 문화사업단 차장으로 일하고 있었고 기획팀장으로 있었어요. TV유치원이라는 방송교재 편집장도 하고 이랬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사고가 경직되잖아요.

매일같이 회사 일에 빠져 지내다 보니까 만화 그리러 대구에서 올라온 인간이 ‘먹고 살기위해서 뭐 하나’ 싶었어요. 직장이란 편한데 안주를 하다보면 먹고 살기는 하겠지만 만화가로서 이것도 저것도 안 되겠다 싶어서 사표를 냈습니다. 주위에서는 안정된 직장에서의 무모한 사직에 미친 놈 취급을 했더랬습니다. 마누라 빼고요”

 

◆ ‘제1회 부천국제만화축제’ 만화정보센터 열어

조관제 만화가는 본격적으로 만화 문화공간 만들기에 돌입했다. 먼저 당시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원혜영 의원과 친분이 있던 신철영 선생을 통해 만화문화공간 만들고 싶다고 전달을 한다. 외국에 만화 문화공간. 만화박물관 그게 있더라. 그걸 한번 해보자 얘기를 했다. 조관제 만화가의 제안에 당시 원혜영 시장은 만화문화 접목이 부천의 Best one Only one 전략으로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추진하도록 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밥상 아래 문화인 만화에 대해 그 누구도 어느 지자체에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만화였지만, 대단한 비즈니스적 사고를 가진 원 시장 덕분에 부천의 만화 문화와 산업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이다.

“1998년이죠. 그때 복사골문화센터 귀퉁이 작은 방에서 참여한 사람도 몇 안 된 상태에서 시작을 했지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 가는 것이라 사연이 많았죠. 많은 공무원들이 도와 주셨는데, 특히 그 당시 막무가내 중구난방 만화가와 함께 사업 추진하느라 고생한 당시 유진생 국장과 김승동 팀장의 노고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에 대한 대우는 어쨌든 시 행정부에서 지원해주겠다고 하니까, 돈이고 뭐고 이건 우리나라 만화계에 굉장히 참 의미 있는 일이다 해서 봉사를 할 작정을 했죠. 첫 번째 부천만화축제를 부천국제영화제에 붙여서 했습니다.”

제1회 부천국제만화축제가 끝나고 사무실을 이전하기로 했다. 도당동에 있던 근화제약 건물인데, 동네가 구도심에다가 그 건물이 우중충하기 때문에 문제 학생들 모여서 거기서 담배피고 술 마시고 뭐 이런 곳이었다. 그런데 만화정보센터가 개원한다는 소문 듣고 갑자기 동네 사람들이 집값이 오른다고 좋아했다. 그때 하나의 문화공간의 힘이 지역사회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는 구나 실감을 했다.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가 5월 5일날 개막을 한다고 그랬습니다. 저희는 하루 앞당겨 개관일을 5월 4일로 잡았습니다. 그때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지요. 당시 만화가들은 두 패로 저를 평가를 했죠. 하나는 저놈은 그냥 이름도 없고 인기도 없는 만화가니까 부천을 등쳐서 자기 영달에 봐 달라 그러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또 한 친구들은 나에 대해서 우호적인 친구들이죠. 저 친구가 몇 번 이용만 당하다 팽 당하지 않겠는가... 이런 걱정까지 했습니다.

5월 4일 도당동에서 개원식을 했을 때 그때 장관도 오고 국회의원도 오고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의전은 단상에 정치인들 등 힘 있는 분들을 앉히는 것이 관례였는데, 원시장은 단상에 원로 만화가를 앉히고 아래에 정치인 국회의원들 앉혔어요. 그런 파격이 만화가들을 정말 감동시켰어요. 행사 끝나고 버스 태워서 갈 때 만화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만화가로 태어나서 이렇게 대접받은 것은 처음이다’ 이렇게 얘길 했어요. 원 시장의 이런 파격적인 의전은 두고두고 만화계에 회자가 되고 만화가를 대접하는 부천이란 브랜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유치에 성공

그렇게 만화가와 시 담당 공무원과 정치인들 모두 호의적으로 도와 준 덕분에 도당동으로 만화정보센터가 입주하고 난 뒤부터는 조금씩 풀려나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쨌든 하고 있는 사업들이 성과를 거두고 중앙정부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본래 만화정보센터는 만화문화정책 개발과 행정지원을 하도록 하고, 만화 도서관과 만화 박물관을 만들어 만화의 학문적 연구와 만화를 시민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하기 위해 모두 지혜를 모았습니다.

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만화의 역사 정리와 보전하는 데 필요한 옛 만화책을 사들였어요. 인사동에 장사꾼들끼리만 옛날 만화 자료들을 사고팔고 하던 때였는데, 부천에서 만화책 산다했더니 졸지에 만화책값이 뛰어버렸어요.

만화 학자들 일부에서는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한국만화박물관을 만든답시고 만화책값을 올려서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여지를 좁혔다. 이런 불만도 있었지요. 어쨌든 초기에 우리가 만화를 싼값에 사놓은 덕분에 지금은 그 가치가 몇 배 정도 올라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전국의 문화클러스터를 5군데를 선정했다. 당연히 부천이 포함되었고, 중앙정부에서 일정액을 지원을 해주고 2년인가 1년인가 지난 다음에 가장 좋은 성과를 낸 곳이 부천이 되었다. 그래서 부천이 중앙정부로부터 300억을 지원받고, 도비 150, 시비 150 해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지었다.

“짧은 기간에 기적 같은 동양 최대의 만화문화와 산업의 허브를 지향하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건립이 되면서 만화정보센터는 과거 역사로 묻히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박물관에 있는 만화는 몇 십만권 됩니다. 옛날에 구입한 만화책도 있고 그다음에 만화가들이 원고를 집에 보관하기 어려우니까 제습효과가 있는 진흥원에다 맡기거나 기증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그 큰 창고도 부족한 그런 상황이 되었어요. 그 다음에 만화도서관 같은 경우는 아시아에서 외국 만화자료가 제일 많지 않겠나 이런 생각입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소중한 만화 관련 자료의 보고인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대한 홍보를 관련 대학 학과와 만화를 좋아하거나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해서 많이 활용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글 | 한도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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