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보둑은 일제의 내지인이 강탈해 가

섬말 앞의 새보둑은 있다? 없다?

▲ 1919년도 지형도에 그려진 새보둑

 정답은 ‘있다’이다. 섬말에서 시작한 새보둑이 대장 마을 , 대장초등학교 앞, 현 오쇠리 앞으로 지나가는 방오리보까지 연결되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조선 중종 때 김안로에 의해서 굴포천을 대대적으로 굴착하기 시작했다. 굴포천을 통째 뚫어 서해로 운하를 팔 결심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원통이고개, 무넘이고개 등에서 큰 바위와 부닥치는 바람에 포기를 해야 했다. 다이나마이트 같은 화약이 일반화되기 전이라 그렇게 한 것이다. 화약은 군사용으로만 썼다. 지금은 경인운하가 그 뒤를 이어 굴포천 하구에서부터 시작해 서해바다까지 시원하게 뚫려 있지만 말이다.

방오리보(方五里洑)가 먼저 생겼다. 오쇠리 쪽이 완만하게 경사진 곳이어서 보를 막으면 농사지을 땅이 많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방오리보의 뜻은 대장 마을에서 오쇠리를 거쳐 멧마루까지 가면 한 5리쯤 된다. 그래서 5리에 걸쳐 있는 보라는 뜻이다. 1911년도에 조사한 조선지지자료에 보면 1890년도쯤 생겼다. 대장 마을 사람의 소유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개인 소유의 보이다. 부잣집 지주가 큰 돈을 내서 보를 만든 것이다. 물론 울력은 동네 사람들이 다 했지만...

새보둑은 한자로 신보(新洑)이다. 조선지지자료에 1900년도쯤에 건설된 대장 마을인지 섬말인지는 모르지만 개인 소유의 둑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둑을 막아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은 지역에서 농토를 개간한 작업을 했다. 산언덕 지역은 밭으로 개간하고 낮은 지역은 논으로 개간했다. 새보둑이 섬말을 지나 대장 마을로 가는데 마을쪽으로 논과 밭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1919년도 지도에 보면 새보둑에 아주 큰 저수지가 생겨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도에도 선명한 데 그 저수지가 아주 컸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그 저수지를 다 메워지고 고리울내의 물길만 조성되어 있다.

1926년도 수정된 지형도에 보면 이 저수지는 깜쪽같이 사라졌다. 동부간선수로를 내면서 대장들판을 경지정리(耕地整理)를 했기 때문이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저주지를 메우고 논을 더 늘렸다. 아니 저수지의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고리울내 하천 폭만큼만 남겨 놓은 것이다.

이렇게 섬말 앞에 새보둑이 생기면서 들이 생겨났는데 번개들이다. 번개들은 조선지지자료에 대장리에 속하는 전야(電野)로 되어 있고 '번개뜰'이라고 해놓았다. 번개들의 ‘번’은 ‘벌어진’의 뜻이다. ‘개’는 포구의 우리말이다. 조선 시대에 한다리 있는 곳까지 황포돛배 같은 배가 들어왔다. 한다리엔 대교 포구가 있었다. 한다리개라고 한다. 이 포구를 통해 많은 배들이 들락거렸다.

부평 팔경 중에서 한다리 근처에서 밤에 불을 켜고 고기를 잡는 모습이 있다. 제3경 대교어화(大橋漁火), 즉 한다리의 고기잡이 불빛이 아름답다는 얘기다. 한다리 근처에서 밤에 고기잡는 배들이 불을 켠 모습이 아련하게 상상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황포돛배가 수시로 들락거렸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번개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전(電)’이 된 것이다. 즉 ‘포구 근방에 둑을 만들고 들을 만들었다’는 뜻의 번개들이 된 것이다. 한다리 근방에서 출발한 새보둑을 막으면서 새로 들판이 생겨난 것이다.

섬말에 있는 김진태씨의 문화재급 기와집을 보면 조선 시대 후기에서야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옛집은 집의 구조가 특이하다. 지붕에 이층 마루를 덧대어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 올라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했다. 이 번개들이 섬말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것이다.

▲ 가을이어서 풀을 벤 새보둑

섬말, 새보둑에 얽힌 이야기

새보둑에 호박 넝쿨이 지천이다. 둑 하나도 가만 두지 않고 호박을 심었음이다. 노란 호박꽃이 저녁노을에 빛난다. 저녁노을도 붉으스름하면서 노랗게 빛나고, 호박꽃빛도 이에 질세라 노랗게 빛을 뿜어댄다.

호박이 심어져 있지 않은 새보둑에는 어김없이 단풍잎돼지풀이 무성하다. 다른 풀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터전을 넓히기에 안하무인(眼下無人) 풀이다.

동부간선수로 오정 누른말 둑길엔 아예 단풍잎돼지풀로만 된 지역이 있을 정도다. 굴포천변을 점령한 것도 바로 이 족속이다. 이 족속은 끈질기기가 돼지 오줌통 같다. 그나마 눈꼽만큼 남아 있는 부천의 개울가엔 단풍잎돼지풀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네 풀들은 구석에 쪼그라져 작은 키들을 곶추세우기 바쁘다.

단풍잎돼지풀은 북미에서 건너와 도둑풀, 누더기풀, 세잎돼지풀이라고도 한다. 누가 아니랄까봐 도둑풀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우리네 산천을 도둑처럼 점령해 순식간에 단풍잎돼지풀로 뒤덮고 있으니 날강도 같은 풀이다. 전 국토를 누더기로 만드는 주범이 바로 단풍잎돼지풀이다. 그렇더라도 이 풀이 쓸모가 있다면 괜찮지만 전혀 이롭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지금의 새보둑은 작은 개울이다. 그 규모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다. 1919년 지형도를 보면 대장마을, 섬말 앞에 거대한 저수지처럼 되어 있었다. 부평, 부천, 김포 일대에서 가장 큰 저수지이었다. 대장마을에서 섬말을 지나 고리울내를 크게 확장해 놓은 것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보(洑)이지만 크게 조성해 놓았다.

베르내와 고리울내가 합쳐져 훨씬 커진 개울이 대장마을 앞을 지났다. 지금은 베르내의 일부는 동부간선수로로 연결되어 버렸지만...

▲ 호박넝쿨이 우거진 새보둑

새보둑은 일제의 내지인이 강탈해 가

이 새보둑(新洑)은 1900년대 초에 조성되었다. 당시 부평군 주화곶면 대장리에 속했다. 그러다가 일본인들이 부천, 부평, 김포에 밀려오면서 일본인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1911년도에 발간한 조선지지자료에는 ‘10여년 전에 축성, 현재 내지인이 소유’라고 되어 있다. 내지인(內地人)은 ‘그 고장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본토에서 온 일본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일본 본토에서 온 사람을 가리켜 내지인이라고 하고, 그밖의 식민지 사람들은 외지인으로 불렀다.

그러니까 대장 마을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새보둑이 일제 내지인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이다. 대장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닥쳐오는 수해를 막고 서해조수로부터 농토를 보호하기 위해 고리울내를 막는 보를 설치했다.

일제는 전국에 걸쳐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를 가지고 동양척식주시회사 등을 통해 불법으로 강탈당해진 토지는 전국 농지의 40%가 되었다.

1919년도 지형도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시점에 제작 배포된 걸로 미루어 새보둑은 일제가 내지인을 앞세워 부천일대, 부평일대, 김포일대에 대대적인 토지 수탈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평수리조합 설립시기인 1922년에 무려 20정보의 토지를 가진 일본인 지주가 21명에 달한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일제는 일찍부터 부천 평야를 주목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대장 마을을 특별히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19년도 지형도에는 대장 마을에 정착한 집들이 부천의 다른 마을의 집들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것은 그만큼 대장 마을 근처에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 겨울 새보둑

대장 마을과 섬말 사이에 새보둑 설치

보란 사전적인 의미로 둑을 쌓아서 강물을 막은 후 그 물을 담아두는 시설을 말한다. 그러니까 바로 흘러내려버리는 개울이나 하천, 강의 수량(水量)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설치하는 시설이다.

이 '보(洑)'는 당연히 농업, 생활용수 등을 취수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보를 막아 내(川)의 상류에 일정한 수위를 유지시켜 취수로를 따라 일정 유량이 유입되도록 설치되었다. 둑 보다는 낮게 만들어져 수량이 아주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보를 넘어가도록 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보(洑)는 고려 및 조선시대를 통하여 농가에 널리 보급되면서 많이 축조되었다. 기존에 우리나라에 설치된 것은 원래 고정식이었다.

조선말부터 불기 시작한 부천 지역내 보 건설도 고정식이었다. 부천에는 새보둑, 방오리보, 멧마루 앞보, 멧마루 중보, 멧마루 후보, 수역리보, 고리울보 등이 있었다. 그 중에 새보둑이 가장 컸다. 나머지 보들은 고리울내, 베르내 상류 지역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새보둑은 고리울내의 하류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이들 보들이 개울물을 저장하고 나머지 흘러온 물을 새보둑이 저장한 것이다. 이처럼 대장 마을, 멧마루, 고리울 마을 지역들이 보를 막아가면서 농사를 짓는데 사활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대장 마을 앞으로 고리울내, 베르내가 흐르고 있다. 현재는 고리울내가 두 가닥의 물길을 형성하고 있지만 1919년도 지형도에는 한줄기 개울이었다. 여기에 베르내가 밖오시 가는 길목에서 합류했다. 두 개의 개울이 합류해서 물의 양은 더 많아졌다.

이렇게 해서 한줄기로 합쳐진 개울이 대장 마을 앞으로 흘렀다. 그런데 대장 마을과 섬말 사이에도 개울이 있었다. 이 개울은 꽃다리에서 흘러내려온 물과 긴등과 꽃다리 사이에 있던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이었다. 이 개울도 제법 크다. 현재 이 개울은 섬말로 흐르지 않고 바로 굴포천으로 흐른다. 이 개울 위쪽에 대장복지회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지역의 표고(標高)는 1919년도 지형도에 해발 5.8m로 표기되어 있었다. 현재는 7.2m이고, 그 아래 논은 7.1m로 많이 땅을 돋았음을 알 수 있다.

섬말의 표고가 1919년도 지형도에는 해발 15.0m인 것에 비교하면 낮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현재에는 14.5m로 기록되어 있다. 산 높이는 0.5m 정도 낮아졌다. 그러므로 이 낮은 지역으로 개울이 흘러내린 것이다. 현재는 대장복지회관을 지으면서 땅을 돋아 표고가 높아 보인다.

새보둑은 고리울내와 섬말과 대장 마을 사이로 흐르는 개울을 막아 농사짓기에 풍부한 수량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섬말과 대장 마을 북쪽의 땅은 넓지만 지대가 높아 이들 지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였다. 현재 이 개울은 섬말 위쪽에서 막히고 그 아래는 논으로 변했다.

여기에 대장마을 앞 지역에 펼쳐진 농지에도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보를 막은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번개들이라고 했다.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이 개울을 막은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 대장마을 앞쪽에 논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이곳은 논으로 되어 있다.

▲ 새보둑을 넘어가는 오정 마을로 가는 다리

새보둑의 큰 저수지 역할

새보둑에는 위치에 걸맞지 않게 큰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길이가 대략 5-600m에 달하고 폭도 아주 컸다. 고리울내 하구는 굴포천으로 바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 중간에 이처럼 큰 저수지를 만든 것은 그 까닭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왜 여기에 저수지를 조성해 놓았을까? 이 저수지물을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은 대장 마을 하구쪽인데, 이들 지역은 서해조수에 노출되어 있어 농사가 원만치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저수지로 서해조수가 밀려들어 밀물과 짠물이 섞여 있는 저수지일 수밖에 없었다.

짠물이 섞인 물로 농사를 지을 수는 없었기에 이 저수지는 그저 서해조수를 잠시 담수해 놓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을까?

저수지 위쪽을 막아 서해조수의 유입을 막고 그 물을 가지고 농사를 짓기 위함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멧마루, 새기, 고리울 지역에 보를 막음으로써 농사짓기에 적합한 민물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이 저수지는 서해조수의 유입을 차단하는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다. 서해조수가 차단됨으로써 위쪽에는 안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어 마을이 번창하고 살림살이가 풍족해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글Ⅰ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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