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 전 오정구청장 공무원 경험담

복숭아 농장, 소사극장, 중앙극장이 있던

칠십년대 부천시의 이모저모

-김인규 전 오정구청장 공무원 경험담

김인규 전오정구청장은 부천 행정전문가이다. 오랜 세월동안 부천시 행정과 함께 했다. 칠십년대부터 진행된 부천시 행정에 대한 진솔한 경험담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편집자 주)  

고향은 강화도 마니산 밑동네

◆ 언제 부천에 오신 건가요?

- 고향이 강화도 마니산 자락 밑동네입니다. 그곳에서 어렵게 살다가 운이 좋아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고향인 강화도 화도면에서 처음으로 공직생활을 하다가 그 당시 선배님이 제가 장남도 아니고 차남이다 보니 “도시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그분의 권유로 원래는 인천으로 가기로 했는데... 인천으로 바로 가기가 버거우니까 가까운 도시에 있다가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했지요. 부천 정도가 좋겠다 해서 부천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가 1973년 7월 1일자로 부천시로 승격을 해서 공무원으로 자리가 나서 부천으로 오게 되었어요.

◆ 부천시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무원들이 많이 필요 했었나요?

-그렇죠. 부천이 군에서 시로 승격을 하면서 당시에 인근 현재 시흥시 소래면이라든가 또 계양면 같은 곳은 그쪽 지역으로 편입을 시켜줬지요. 부천만 소사읍으로만 부천시를 태동시키다 보니까... 공무원 자리가 어느 정도 생기기 때문에...

◆ 오정구 쪽도 김포로 편입되고 그랬죠?

- 그때 당시에 춘의사거리를 경계로 해서 오정면이기 때문에 김포로 편입이 되었지요. 부천남부역 맞은편 쪽에 종전에는 새천년 웨딩홀이라고... 그 자리가 부천군청 자리였습니다. 부천시로 승격이 되면서 시청자리가 되었지요. 제가 거기에 근무했었죠. 오랜 세월동안 군청자리였지요. 또 바로 시로 승격된 자린데... 지금은 어떤 표지석도 없어요. 사실 이렇게 재조명하니 상당히 아쉬움이 남네요. 저도 공직생활 했던 사람으로서 부끄럽습니다. 후배공직자나 시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면 고집스럽게라도 그런 자리를 거론해서 표석이라도 해놓으면 길을 걷다가 ‘이 자리가 군청자리, 시청자리 였구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는데... 소사읍자리도 일찍이 상가가 들어와 가지고 아마 그 자리가 어딘지 아는 분들이 점점 줄어들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이 됩니다.

▲ 1960년대 경인국도

◆ 그 70년대에는 경인국도가 비포장 상태였었죠?

- 부천 남부역 경인국도 쪽은 시가화 지역이어서 제가 왔을 때는 4차선 정도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었어요. 한 1km 정도 남짓 되었지요. 송내 방향 쪽으로는 2차선으로 포장이 되었지만 다른 도로는 다 비포장이었죠. 소사 삼거리까지... 당시에는 경인국도가 소사3거리에서 보시면 사잇길 같은 대로 연결이 되었죠. 원래 경인로라고 구한말부터 도로가 뚫렸지요. 그 길이지요. 그 길을 경인로로 확장했지요. 조선시대부터 있던 길을 더 확장해서 사용한 역사적인 길이지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옛소사구청 있는 그쪽 길이 살아 있고... 그 길이 지금 역곡3동 사무실 있는 앞쪽으로 이어진 거죠. 또 하나는 어느 쪽이 살아 있냐면... 솔안말, 송내쪽에 살아있지요. 아마 그런 길을 아시는 분은 몇 분 없을 겁니다. 80년초에 확장공사로 직선도로를 내서 잊혀진 길이 되었지요.

◆ 당시 부천시청이 있던 심곡본동에 대해 이야기 해주세요.

그때에도 유한양행 건물자리들은 다 있었죠. 실제로 존재를 했었죠. 옛날 건물 모습 그대로... 공장이라든지.. 몇 년전전까지만 해도 실제 했었는데... 이제는 부셔버리고... 어떻게 보면 기존에 부천에 있던 건물들이나 이런 것들은 일단 부수고 보자 이런 것 같아요. 옛집 같은 이런 걸 크게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없애버리고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거죠. 

역곡에 경기도 농사시험장

◆ 역곡에 있던 경기도농사시험장도 보셨나요?

- 네. 농촌시험장인가... 그 뽕나무 심고...그 건물이 그때에 남아 있었죠. 새로 난 경인국도로 쭉 가시다가.. 유한대학 못가서 좌측에 온수교가교로 넘어가서 약간 좌측으로 100m쯤 들어가서 그 근처일 겁니다. 옛날에 육교 그 밑이 땡땡이 골목이라고 했어요. 기차 지나갈 때 땡땡땡 거리면서 내려오던 자리이거든요. 부천역에도 땡땡이골목이 있었고, 여기에도 있었죠. 거기서 쭉 올라가셔서 그때는 뽕나무 심어놓고 그랬어요. 농사시험장이라고... 그때 경인간으로 다니던 시외버스 차장 안내도 시험장이라고 그랬을 겁니다. “시험장입니다. 내리세요!”

◆ 역곡 일대에 뽕나무가 아주 많았단 얘기네요.

- 역곡 마을이나 벌응절리 일대, 그리고 그 맞은편에 있는 행정구역상 역곡3동이라는 곳은 법정동으로 괴안동이라고 했지요. 윗괴안 아랫괴안 그쪽은 전부 야산이었습니다. 집들이 거의 없었죠. 거기는 옛날 바우백이라고 했죠. 전부 야산에다가 자연부락이 몇 개 없었어요.

◆ 경기도 농사시험장 안에도 들어가 보시고 그러셨나요?

-전 못 들어가 봤구요. 제가 여기 부천에 왔을 때가 수원으로 이전하는 단계로 들어갔을 때입니다. 거의 준비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활성화 그런 거는 없었어요. 뽕이나 누에 같은 것은 생산을 안했을 때였어요. 바로 택지개발 한다고... 그런 움직임이 시작될 때였지요. 택지개발을 하면서 그 건물들 다 부셔버리고 말았지요. 그 건물이 남아 있었으면, 보존이 되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일제강점기 때 건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60년대는 역곡 지역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지요. 누에를 많이 생산했었죠. 그곳 옆에 원잠종제조소라고 누에씨를 생산하시던 곳이 있었지요. 그때는 그런 것들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지요. 

▲ 경인국도 소사복숭아 좌판

 당시 부천은 복숭아 나무 농사 천지

◆ 처음 공무원하시면서 어떤 업무를 맡았어요?

- 부천시로 승격했을 때 여섯 개 동인가가 생겼지요. 그렇게 태동을 했어요. 제가 그때 운이 좋았지요. 그때만 해도 농사행정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골에서 살아와서 농사행정을 아주 싫어했지요. 다행이 심곡본동 동사무소에 근무했습니다. 당시 동사무소는 읍사무소 자리가 동사무소로 된 거죠. 동사무소에서 열 달 근무를 하다가 바로 시본청으로 가서 근무를 했습니다.

◆ 옛날에는 복숭아 나무농사를 많이 지었을 텐데...

-그때 부천은 복숭아를 모아 파는 원예협동조합이 있었습니다. 소위 깡시장이라고 하는 곳에 복숭아 통조림도 만들고 그랬지요. 거기 공장도 있었고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복숭아밭이었지요. 송내동과 경계에 있는 그쪽은 전부 공동묘지였었습니다. 제가 왔을 때 이장한다고 파서 웅덩이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 밖에는 전부 복숭아밭이 있었고요.

◆ 땅이름으로는 검디라고 했었죠.

- 거기까진 모르고 원예협동조합쪽은 깊은구지라고 오목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말씀들 하셨지요. 원예협동조합에서 송내역 방향쪽으로 느티나무도 큰 것이 있었죠. 보호수로 있었죠. 깡시장 바로 옆이었지요. 1974년도에 공보실에 근무했을 때 동네별로 보호수목을 조사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어요. 동네별로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도 있고 그랬지요. 표지판도 설치하고 했던 제도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쪽에 큰나무가 있었고, 여월동에도 은행나무 있었고, 소사3거리 서울신학대학 가는 곳인 세종병원 입구 들어가는 곳에 버스정류장 옆에도 큰 느티나무가 있었고, 세종병원 입구에 은행나무도 보호수로 지정도 되고 그랬었죠.  

공보실 근무로 영화는 실컷 봐

◆ 그때 소사극장이 있었나요?

-아, 그럼요. 바로 그 자리가 깡시장 바로위에 있었지요. 소사읍사무소에서 바로 10시 방향에 길하나 사이였죠.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소사극장이 있었어요. 읍사무소에서 30m 정도로 길 하나 사이에 있었죠. 1974년도 공보실에서 근무를 했을 때 영화업무도 보았어요. 당시 소사극장에 들어가면 맨 뒤에 공보실 자리, 경찰자리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청소년불가라든가, 임검석 비슷한 게 있었지요. 그 핑계대고 자주 갔었죠. 극장에 그런 제도가 있었어요.

소사극장이 부천에서 제일오래 되었지요. 그 다음으로 부천북광장 쪽으로 내려오면서 중앙극장이라고 생겼죠. 나중에... 소사극장은 60년대부터 있었고, 중앙극장은 70년초에 생겼을 거예요. 제가 왔을 때 두 개 극장이 있었거든요. 그때 중앙극장이 아주 컸기 때문에 극장에서 큰 행사를 치루고 그랬었어요.

◆ 시 행사도 많이 했겠네요.

- 중앙극장에서 큰 행사는 별로 안 했구요. 그때는 시국이 유신 때라 부천역 북광장 오픈스페이스 광장에서 앰프 설치하고 주민들 모아놓고 연설하던 시절이었죠. 운동장 같은데서 모였구요. 뭐 시민체육대회는 시 시운동장이 없어서 시온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했구요. 시민의날 체육대회도 시온고등학교 교정에서 했죠. 새마을운동이 70년인가 71년도에 공식적으로 시작했으니까... 처음 시작했을 때... 노래도 나오고.. 새벽종이 울렸네... 그때 읍사무소나 이런 데는 앰프로 크게 틀어놓고 그랬지요. 시가화된 지역에는 대청소를 했죠. 매일 청소하는 것이 주 업무었죠. 아마 80년초까지 그렇게 했어요. 가시적인 환경을 많이 따지다 보니까 청소를 많이 한 거죠. 어떻게 보면 대역행정이죠. 시민들 스스로 해야할 것을 공무원들이 나서서 한 거니까... 시골에는 산업행정이 90%이상이었고... 뭐 농촌개량운동, 지붕개량, 소하천정비, 그리고 벼품종개선 통일벼 같은 거에 주안점을 두고 일을 많이 했었죠.

▲ 1960 자유시장 전경

자유시장으로 개울이 흘러...

◆ 심곡동에 개울이 흘렀지요?

유한양행 공장이 있는 곳에서 개울이 흘러내렸지요. 성주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것입니다. 아마 그때는 복개가 안 되었어요. 복개가 된 거는 그 후의 일이었지요. 그때는 개울이 오픈 되어 있었죠. 현재의 이 심곡복개천하고 합류 했지요. 소새에서 흘러내려서 소사역을 거친 뒤 원미초등학교, 소방서까지 다 오픈 되어 있었죠. 북부역 북광장에서 중앙로로 내려올 때 1차선 정도 복개가 되어 있었어요. 어떤 차가 빠진 사고도 있었어요. 하천이 복개된 거는 80년 초쯤으로 알고 있어요.

◆ 성주산에서 내려온 개울에 대해서 더 설명해 주세요.

당시 중앙로로 흐르는 물이 두 개 지점에서 만났어요. 본래 심곡동 성주산에서 내려오는 것은 남광장 있는 쪽으로 내려와서 자유시장이라고 해서 그 안으로 흘렀지요. 거기에 땡땡이 골목이 있습니다... 철길로 합류해서 내려오던 곳이었지요. 물길이 그곳을 통과했지요. 다른 개울은 소명지하도 쪽에서 내려와서 합류했습니다. 당시는 자유시장이라는 곳에 개울이 흘렀죠. 큰나무 판자를 괴어놓고 건너 다녔어요. 나무 다리 아래로는 하천이 흐르고...

◆ 그때도 자유시장이 있었나요?

자유시장은 상당히 오래된 시장입니다. 오십년 그전부터 생겼을 거예요. 시장이 자유롭게 형성된 것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 시장을 현대화를 하면서 저도 그 업무를 봤어요. 1979년도인가 시장이 워낙 노후 되고 화재의 위험성이 있다 해서 현대화를 하자고해서 건물을 지은 겁니다. 그때 제업무가 담당계장이었어요. 1979년도부터 시작해서 1980년도에 준공을 한 거죠.

◆ 경인국도에서 복숭아를 팔기도 했나요?

송내에는 군부대가 있었어요. 그때는 예비사단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쪽서부터 유한대학이 있는 곳까지 시외버스 노선이었지요. 그때 젊은 친구들이 바구니에 복숭아를 담아 들고 버스 안으로 들어와서 팔았지요.

경인국도 노변에선 밤에 전깃불 끌어내 불을 밝힌 뒤 복숭아를 팔고 그랬지요. 그렇게 한 2~3년도는 했어요. 그러다가 1976년쯤 되니까 완전히 쇠퇴기로 들어섰어요. 노변에서 복숭아를 파는 그런 장사가 잘 안 되었나 봐요. 성수산 산자락 있는 곳에서 복숭아 농사도 짓고 그랬었는데... 그 이후로 슬금슬금 다 없어졌지요.

◆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그 많던 복숭아밭이 다 사라진 거 아닌가요?

그렇죠. 그때 시가 좀 복숭아 단지를 사 놓던지...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복숭아 나무들을 뿌리 채 다 캐 나갔지요. 부천에서 처음으로 삼익아파트 들어섰지요. 소사경찰서 올라가는 중간지점에 있는 아파트입니다. 삼익아파트는 1976~7년에 생긴 아파트로 유명 탈렌트 노주현씨가 거기와서 선전한다고 해서 한 번 가봤지요. 노주현씨가 아파트 광고 모델로 직접 현장에 온 거지요. ‘검디’라는 곳입니다.

당시 송내 경계 있는 데가 조금 숲이 울창하고 그랬지요. 지금도 약간 계곡이지요. 당시 공동묘지는 소사경찰서를 중심으로 심곡동 능선 있는 곳 쪽으로 쭉 형성되어 있었어요. 본래 송내동 쪽에는 공동묘지가 없었어요. 그리고 소사 그쪽에 공동묘지가 있었고... 

부천수영장 이야기

◆ 극동아파트가 생기면서 부천수영장이 있었다고 그러던데요?

70년대 후반에 생겼을 겁니다. 유한양행 부지를 사가지고 그런 거죠. 거기가 유한양행 앞이었고, 제 기억에는 펄벅재단이라고 혼혈인들 있는 그런 기숙사 비슷하게 있었지요. 그곳이 약간 계곡처럼 되어 있었어요. 든전물이라고... 여기다가 어떤 분이 수영장을 만드셨지요. (극동건설에서 만든 것은 아니고요. 땅도 좀 많이 갖고 계신 조씨 성을 갖고 계신 분이 만들었지요.

◆ 부천수영장에 대한 추억들이 아주 많더라고요.

부천에서 유일한 수영장이었지요. 그게 몇년 사이에 슬그머니 폐장되는 식으로 되어 버렸지요. 저희들도 거기 한번 가봤으니까... 그때 당시 에피소드가 있죠. 저희들도 거기 갔다가 한번 딱 들어갔는데, 퇴짜를 맞았죠. 수영복을 갈아입고 가야 하는데, 그걸 몰라서 탈의실에서 아예 벗고 수영장으로 들어가다가 제지를 당하고 그랬어요. 저도 그랬죠. 수영장을 목욕탕하고 같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요.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때 만해도 저희들이 안 입고 들어가려고 그랬지요. 제대로 된 수영복이 없었지요.

◆ 그러면 소사극장 아래에 소사목욕탕이 있었지요?

소사극장 바로 밑에 목욕탕이 있었지요. 그리고 북부역 광장쪽에서 부천전화국쪽으로 가다보면 100m 사이에 목욕탕 큰 거 하나 있었어요.

▲ 1960년대 펄벅재단의 모습

◆ 당시 펄벅재단은 어쨌어요?

저는 펄벅 여사를 보지를 못했어요. 제가 근무했을 때 그분들의 마지막 단계였어요. 당시 동사무소에서 병사업무를 봤어요. 당시 징병검사장이 남초등학교에 있었지요. 펄벅재단에 있던 분들이 혼혈아들이어서 병역면제를 시키라고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기억이 생생하죠..

마지막 징병검사를 저희가 했어요. 징병검사 통지서를 주고 데리고 와서 징병관이 판정을 내려 주었지요. 펄벅재단 출신들은 면제 판정을 해주었죠. 그때만 해도 병력자원에 대해서 크게 의지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 당시 심곡도서관이 지어지기 전이지요?

물론입니다. 당연히 지어지지 않았죠. 그 자리는 충혼탑 자리입니다. 충혼탑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지금의 소사구청 자리도 약간 동산입니다. 거기에 임시로 있었죠. 그러다가 나중에 이쪽으로 온 거죠. 거기서 임시로 활들을 쏘고 그랬었죠. 나중에 현대화 된 개념으로 그 위쪽에서 활을 쏘았지요. 그 무렵에 육각정이 생긴 것 같네요. 그곳 활터를 관리하면서 무형문화재 되시는 분이 계셨지요. 김장환 선생이라고... 자유시장 가기 전 경계 그쪽에서 직접 활을 집에서 만드셨어요. 그분은 활터에 대한 애정이 참 많으셨죠. 그때 활터를 임시로 만들어 놓고 그러셨어요. 그 뒤 김박영 선생이 국궁을 만드는 일을 배워서 했지요.

글 ∥ 한도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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