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토박이들이 사용하던 생활유물 수 만점을 수집한 진말 이현각 선생

제대로 된 부천역사박물관이 있어야

부천 토박이들이 사용하던 생활유물 수 만점을 수집한 진말 이현각 선생

 

 
 

◆ 부천의 의인 이성근 한의사 손자인 이현각 선생

이현각선생은 진말에 산다. 부천 토박이로 한의사 이성근의 손자이기도 하다. 한의사 이성근은 자신이 제조한 ‘광제고’라는 고약의 효능이 뛰어나 수많은 이들을 치료하는데 썼다. 당시 멧마루에 한약방을 냈던 이성근은 빈부를 막론하고 무료 진료를 펼쳤다. 1929년 오정면 주민들에 의해 이성근의 공덕을 기리는 ‘의생 이성근 자선비’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1936년 8월 5일 동아일보에 이성근 관련 기사가 실렸다. 동아일보는 이성근을 지칭해 “살아서도 가난이고 죽어서도 어렵다는 천편일률로 받는 사망진단서를 받지 않고, 신농씨(神農氏) 도효(桃梟)에 더러워진 것을 가하지 않는 박애의 의생 이성근”이라고 칭송하였다. 이성근은 1929년에 부천초등학교 전신인 소사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1934년에 오정초등학교 전신인 오정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교육발전에도 기여하였다.

 

◆ 날마다 고물상을 뒤져 생활유물들 수집해

이 같은 공적을 가지고 있는 이성근 한의사가 부천시에서 별다른 존경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에서 손자인 이현각 선생이 부천의 향토문화재 수집에 전재산을 쏟아 붓다시피 해서 근현대 유물 수만 점을 모아 놓고 있어 화제이다. 이들 유물들은 이현각 선생이 직접 고물상을 뒤지거나 집들이 헐릴 때 현장에 가서 수집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실제 부천에서 살았던 이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이어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할 것이다.

“부천에서 살던 이들의 손때가 묻은 유물들을 수집하고 또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슴을 다쳐가지고 거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아픈 가운데서도 수집을 그만 둘 수 없어서 저 혼자 좋아서 수집하고 있지요. 일주일에 서너 번씩 잘 아는 고물상 같은 데를 다니면서 부천 여기저기서 들어온 유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사서 보관하고 그런 거지요.”

 

◆ 현부천향토역사관은 너무도 초라해

부천이 8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집들이 늘어나면서 토박이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들은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고 했다. 매봉재 개롱지에 있던 부천향토역사관이 비좁고 허름하다는 이유로 점말 옹기박물관으로 옮겼다. 하지만 역사유물이라고는 고리울 봉배산 청동기유적 유물 몇 점, 화유옹주묘에서 나온 유물 몇 점, 청주한씨 유물 몇 점이 전부이다. 이 유물들도 오는 9월이면 중앙박물관으로 되돌아가야 할 처지이다. 진품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아마도 모조품을 전시할 터이다. 부천향토역사관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너무 초라한 전시실이다. 근대 유물이랍시고 재봉틀 등이 전시되고 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현각선생이 부천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수집한 근현대 유물들은 부천의 살아있는 역사일 수밖에 없다. 진말 집뿐만 아니라 새마을 빈집까지 꽉 찬 유물들은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고 그저 쌓아놓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 있는 유물들은 다 부천에서 생활하던 물품들입니다. 부천의 역사이고 부천의 문화이고 부천의 생활용품들이지요. 부천 토박이분들은 그동안 집안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유품들을 집안에 두려고 하지 않고 곧바로 고물상에 내다 팔거나 하지요. 그런 것들을 수집한 것들입니다. 어떤 때는 날마다 고물상을 순례하고 몸이 아플 때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순례를 합니다. 제가 몸이 건강했을 때는 열심히 수집했지요. 그 수집한 것들을 문지르고 닦고 잘 보관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픈 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쌓아놓고 있지요.”

이현각선생은 유물 수집이 토박이로서 의무라고 했다. 토박이가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역할을 하지 않을 것 같아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지금은 집안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접시 같은 것들을 그저 다 버린다고 했다. 오랫동안 부천에서 누군가가 사용한 짐바리 자전거도 수집해서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저 버리는데 우리는 그런 게 보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부천 마을 선조들이 다 쓰던 것들이어서 따지고 보면 하나도 버릴게 없는 거예요. 함부로 버려서도 안 되는 물건들이지요. 부천향토역사관을 새롭게 짓거나 할 때 정말 소중한 유물들입니다. 다른 지역에 가서 사오거나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떡 하니 수집해 있는데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이나 이런 데서 사다가 전시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부천향교나 부천향토박물관 지어달라!

이현각선생은 부천시나 누군가 나서서 부천향토역사관이나 부천역사발물관을 짓는다면 기꺼이 기증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부천향교가 입주를 할 수 있게 해주면 거기에 유물들을 전시할 용의가 있다고도 했다. 김만수시장이나 다른 시장에게 건의를 해보았냐는 질문에 “제가 건의한다고 부천시장이 들어주나요?”라는 낙심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 부천에도 앞으로 향교가 있어가지고 아이들에게 소학도 가르치고 부천의 역사도 가르치고, 전통예절도 가르치면 얼마나 좋아요. 저는 그 소원밖에 없어요. 옛날 전통을 되살릴 수 있고 하는 사람들이 좀 있어야 하는데... 부천에 살던 조상님들이 갖고 사용하던 것들이지만 저 죽으면 다 쓰레기가 될텐데... 그 생각을 하면은 너무도 부천이 한심한 거예요. 제가 수집하던 것들 중에 동네에서 사용하던 장구라던가 징이라던가 그런 것들도 있지요. 마을 도당제나 장말굿 등에서 사용하던 것들이지요.”

이현각선생은 자신이 수집한 유물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부천의 역사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심곡천이 아니라 돌내에 얽힌 이야기도 새로웠다. 돌내는 예전에 금빛 모래가 지천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깊은구지나 진말에 집을 지을 때 업자들이 자동차를 몰고 와서 마구잡이로 모래를 퍼다가 썼다고 했다. 한참 집을 짓기 시작하던 70~80년대에 돌내의 황금모래는 거의 사라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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