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말은 아파트 단지 건설로 영영 사라져...

▲ 산골말 느티나무

 350살 먹은 느티나무가 있는 산골말

윗말은 아파트 단지 건설로 영영 사라져...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 산골말은 어디에 있는가?

현재 산골말은 부천여자중학교 아래 송내 398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아직 철거계획이 없다. 아파트를 지을 계획도 없다. 산골말이 아랫말과 윗말로 나뉘는데, 윗말은 현재 송내 래미안 408세대 아파트 단지 조성을 위해 철거 중이다. 윗말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아랫말은 아직까지 건재하다. 그렇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그게 부천의 역사이다. 전통 마을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사라져 버렸다.

부천여자중학교 정문에서 길을 건너면 산골말 아랫 마을길로 들어선다. 길이 곧게 뻗어있는 것이 아니라 삐뚤빼뚤 그어져 있어 옛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경인로 60번길에서 마을 안으로 성큼 들어서면 된다. 옛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삼현빌라, 성원타운, 성은교회, 꿈꾸는 어린이집, 애견산업 아몬스, 부천콘텐츠센터가 들어서 있다.

바로 곁에는 예전 한국전력공사 부천지사 건물이 폐허가 된 채 철거를 앞두고 있다. 이곳을 철거하고 어떤 건물이 들어설지는 아직 미정이다. 한전이 다른 곳으로 이전한 뒤 부천문화원이 잠시 이 건물을 쓰다가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했다. 이 건물 외곽벽에는 부천문화원이 남겨놓은 벽화가 을씨년스럽게 장식하고 있다. 산골말 이야기하고는 동떨어진 대장마을 건너 마을인 섬말의 아기장사 이야기인 말무덤 설화를 그려놓았다.

 

▲ 1919년도 산골말 지형도

◆ 일제강점기 시대의 산골말

일제강점기인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당시 산골말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 산골말은 경인국도 남쪽에 위치해 있다. 거마산에서 연결된 상살미 초입 부분이다. 상살미 북쪽에는 솔안말, 구지말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 세 개의 마을이 살상미 언덕에 나란히 형성되어 있었다.

 

이 지형도에도 산골말이 아랫말과 윗말로 나뉘어 있다. 윗말은 아랫말에서 골짜기를 건너 산언덕에 8채 정도의 집이 있다. 마을 집들이 둥그렇게 뭉쳐져 있다. 윗마을 가운데로 깊은구지에서 마리고개를 건너 온 소로(小路)가 통과했다. 이 소로는 아랫말 위 부분으로 지나간다. 현재의 부천여자중학교 정문 길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윗말엔 1980년대 이후 단독주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이때부터 옛건물들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들로 채워졌다. 그 이후 송내 래미안 총 832세대 아파트 건설이 예정되어 있다. 현재 이를 위해 현재 철거 중이다. 철거하는 가운데 거마산에서 뻗어온 산등성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파트를 짓지 않고 그대로 두면 옛 산등성이 복원이 이뤄질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아랫말은 현재와 같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졌다. 경인국도와 마리고개에서 온 소로(小路) 사이이다. 8채 정도의 집이다. 맨 남쪽에 ㄱ자 집으로 아주 큰 집 한 채가 있다. 눈에 띈다. 마을 동쪽으로 낮은 산언덕이 있다. 현재 송일초등학교 근방은 논으로 표기되어 있다. 제법 지대가 낮아 논으로 일궈 벼를 심은 것이다.

산골말엔 아랫말과 윗말 사이에 작은 골짜기가 있다. 지금은 그저 도로로 이용될 뿐이다. 그 너머 동쪽엔 산골과 도티골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낸 골짜기가 있다. 산골이 있어 산골마을이다. 두 개의 골짜기가 나란히 내려오다가 산골 마을 아래에서 서로 만난다.

산골은 현재 공사중인 산골공원(가칭)에서 출발해 송내동신아파트와 부천고등학교 사이를 거친 뒤 신한일전기(주) 앞으로 이어진다.

 

▲ 산골마을 윗말 철거전

◆ 현재의 산골말 모습

항공사진은 1974년도에 하고, 현지조사는 1976년 11월에 한 뒤 1977년 5월에 인쇄한 지도를 보면 산골말이 위아래 구분 없이 길게 이어져 있다. 마을이 커졌다. 1919년도 지형도 때보다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현격하게 많은 집들이 들어선 것은 아니다. 이때까지는 부천이 산업화의 격랑 속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천은 80년대 이후 송내공단, 소새공단, 춘의공단, 도당공단, 내동공단, 삼정공단이 들어서면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집들도 덩달아 들어섰다. 그때부터 현격하게 부천의 전통마을은 허물어져 버렸다.

이 지도에는 산골말이 아니라 상골말로 되어 있다. 산골하고 상골은 그 차이가 있다. 상골은 위에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아마도 지도를 그린 이가 산골을 상골로 이해를 해서 지도에 표기한 것이다. 그래서 지도제작에 참여한 분이 현지조사를 했지만 제대로 했는지 의문이 든다. 주먹구구식 조사. 당시 마을 사람들은 분명하게 산골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상골말로 알아듣고 그대로 표기한 것이다. 이렇게 지도에는 오류가 많다. 일제강점기 지형도가 오히려 더 정확하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우리나라를 지배해야 되는 필사적인 이유가 덧붙여 더 악랄하게 조사를 한 것이다.

이때 산골말은 경인국도 북쪽에서 산골 위까지 길게 이어진다. 산골말 아래 남쪽에는 세광상사, 은성공업(주)이 입주해 있다. 산골말 중간 쯤 동쪽으로 산골 너머 언덕엔 송내상동 사무소가 위치해 있고, 서흥창고가 위치해 있다. 산골말이 송내상동으로 바뀌었다. 부천여중고가 들어서기 전이어서 이 자리까지 마을 집들이 늘어서 있다.

부천여중고는 1980년도 3월 1일에 개교했다. 이후 3년 뒤인 1983년도에 부천여자고등학교는 사래이인 상동으로 이전했다. 부천여자중학교만 남은 것이다.

1987년도에 현지조사한 지도를 보면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한 부천여자고등학교까지 합쳐 놓고선 부천여중고로 표기해 놓고 있다. 이것도 오류이다. 4년 전에 부천여자고등학교는 이전을 했기 때문이다.

1976년도 현지조사한 지도에는 윗말은 산골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너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몇 채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총 14채이다. 그런데 1987년도 현지조사한 지도를 보면 윗골에는 수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음을 볼 수 있다. 불과 10년도 안 된 사이에 산골말이 천지개벽(天地開闢)을 한 것이다. 옛집들은 모두 사라지고 새롭게 지어진 단독주택으로 채워졌다. 솔안말 지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집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노동자들이 기거할 집이 대거 필요했고 산골 윗말에 대대적으로 단독주택이 들어서 이들 수요를 충당했다.

1976년도 현지조사한 지도에서 산골이 시작되는 산언덕에는 묘지 몇 기가 있다. 이후 1987년도 현지조사한 지도에는 묘지가 있던 곳에 그린필드골프 연습장이 들어서 있다. 골프가 본격적인 스포츠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사업하는 이들이 너도 나도 골프연습장을 찾았다. 이 골프연습장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헬로우TV, 부천명성교회가 있고, 동쪽으로는 동신아파트 380세대 단지가 들어서 있다. 현재 산골공원(가칭) 서쪽 건너편이다.

산골 동쪽 언덕에는 부천고교, 부천탁주제조장, 세광특수인쇄소, 유성기업, 진로주조(주)가 자리를 잡았다. 이를 기업들은 산골 골짜기를 배경으로 해서 넓게 자리를 잡았다. 유성기업, 진로주조 등은 타지역으로 이전을 했다.

1974년 3월 7일에 입학식을 거행한 부천고등학교, 1964년 한일전기 창립한 뒤 1965년 한일전기(주) 신공장을 산골에 준공해서 이전을 했다. 이후 1968년 신한일전기(주) 설립했다. 이 신한일전기는 현재 그대로 있다.

부천탁주제조장이 위치한 곳엔 동창산업 등 여러 업체들이 들어서 있다. 세광특수인쇄소 자리는 부천교육청에서 부천문화원으로 변신했다가 지금은 송내어울마당으로 새롭게 변모했다.

유성기업에는 부천중동역푸르지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진로주조(주)에는 뉴서울 아파트가 들어섰다. 부천 진로주조(주)에선 포도주를 생산했다.

산골은 사래이 들판에서 도티굴에서 흘러온 개울물을 만난 뒤 구지내하고 합류해서 굴포천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 산골말 느티

◆ 산골마을 역사의 산 증인, 느티나무

산골말엔 평산신씨 후손들이 350년이 넘게 살았다. 여기에 죽산 박씨들도 더불어 살았다. 지금은 다양한 성씨들이 집합소가 되었다. 마을의 역사를 증명해주는 나무가 있다.

부천여자중학교 교문에 들어서면 서쪽에 우람한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가리켜 디지털부천문화대전에선 솔안말 느티나무라고 소개해 놓고 있다. 이곳은 솔안말이 아니라 산골말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산골말 느티나무라고 정정해야 옳다. 앞으로 남겨진 과제 하나가 추가 되었다.

산골말 느티나무는 부천에서 제11대 국회의원을 지낸 신능순(申能淳)의 8대조이자 선공감 부정을 지낸 신사현(申思顯)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공감은 조선시대 토목이나 건축 공사를 감독하던 하급 관직이었다. 도성 안에 있는 백악산, 남산, 인왕산, 타락산의 성첩(城堞)과 수목을 관리하던 관원이었다.

산골말 느티나무는 신씨 집안의 보호수이자 마을을 지켜주던 당산나무 역할을 해왔다.

산골말 느티나무는 높이는 9m이다. 나무의 둘레를 잴 때는 흉고직경(胸高直徑)이라는 용어를 쓴다. 지표에서 1.2m 높이를 재는 것을 흉고직경이라고 한다. 그 보다 조금 위인 1.3m를 예외적으로 재기도 한다. 그 이하에서 가지가 갈라진 것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한다. 한 나무에서 출발했지만 몇 개의 나무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흉고직경(胸高直徑)에서 잰 산골말 느티나무의 나무줄기의 직경은 1.36m이다. 느티나무 밑부분에서 세 개의 가지가 뻗어 나왔다. 그 위쪽으로 가지 2개가 뻗어 있다. 한 나무에서 5개의 가지가 뻗어 나왔다. 여러 가지가 나온 관계로 느티나무는 위로 커 올라가지는 않았다. 대신 옆으로 퍼져 있다. 부천여자중학교 건물을 가리며 서 있다.

이로 미루어 산골말 느티나무가 어린 묘목이었을 때 맨 위쪽 가지가 잘려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 위쪽 가지가 존재했다면 위로 쭉 뻗어 올라갔을 터인데 대신 5개의 가지가 옆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산골말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일부러 위쪽 가지를 잘랐는지 아니면 태풍이나 다른 자연 현상으로 잘렸는지는 알 지 못한다.

산골말 느티나무 주변으로 학교에서 세운 사자상이 있다. 그리고 신사임당 동상도 세워져 있다. 작은 동산으로 가꾸면서 이층으로 재단한 향나무도 심어져 있다가 이를 다른 곳으로 옮기었다. 대신 느티나무 근방에는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다.

2009년 4월 3일자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 철거전 산골마을 윗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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