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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기 마을’, 이름 유래를 찾아서....
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  hansa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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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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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동 쐐기 마을의 모습 (현 원종4거리)

    ● 새기 마을에 대한 기록 역사
새기 마을에 대한 어원적 풀이는 참으로 어렵다. 우리나라 땅이름은 한자어, 순우리말이 복합적으로 뒤엉켜 있다. 이처럼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 호구총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같은 지리서, 1911년도에 출간한 조선지지자료, 일제강점기 1919년도 부천지형도, 현대지도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을에 정착해서 살았던 분들의 묘지 등이 기록되어 있는 족보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총 섭렵해서 마을의 역사를 유추 해석할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을에서 대대손손(代代孫孫) 살아온 분들의 증언이다. 땅이름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그의 아들로, 아들에서 손자로 대대로 구전되어 왔다.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기에 순우리말일 수밖에 없다. 기록되어 있지 않은 우리말... 그동안 땅이름을 해석하면서 이 순우리말을 소홀히 해서 소중한 땅이름의 의미를 철저하게 놓치고 말았다. 다행이 토박이말, 탯말 등을 근본으로 하는 땅이름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어 보편적인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민중들이면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고 읽힐 수 있는 것이 땅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유래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걸 한자로 옮기면서 해석 불가능한 땅이름이 되기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선 멧마루인 원종리, 새기 마을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당시 부평도후부 전체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당시 부평도호부 전체 호수가 4백 29호, 인구가 9백 54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0명, 선군(船軍)이 1백 28명이라는 기록이 전한다. 이로 미루어 조선시대 전기엔 원종리, 새기 마을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았더라도 몇 호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새기 마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58년도에 편찬한 의령남씨족보에서 찾아진다. 남연과 더불어 부천에 내려와 여월 마을에서 살았던 남징(南澄)(1645~1685)의 묘가 수역리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조선시대 공공기록인 호구총수(1789년) 보다 31년 빠른 기록이다. 그러기에 애초부터 새기 마을이 한자로는 수역리로 불리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새기 마을에 대한 기록은 정조 13년인 1789년에 규장각에서 출판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있다. 전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호구조사를 꼼꼼하게 해서 기록한 것이다.
이 호구총수에선 새기 마을이 부평부 하오정면 화력리(禾力里)로 기록되어 있다. 이 화력리는 이때만 기록으로 쓰이고 그 뒤에는 사라져 버렸다.
왜 호구총수에선 화력리로 기록했을까? 여기에선 ‘벼 화(禾)’에 주목해야 한다. 조선시대에 벼 화(禾)의 발음은 지금하고는 전혀 달랐다. 벼 화(禾)의 우리말 기록은 ‘쉬 화(禾)’였다. 그러니까 쉬라는 말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1576년도에 유희춘이 발간한 신증유합(新證類合)에는 명확하게 ‘쉬 화(禾)’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유합은 한자에 대한 우리말 풀이를 꼼꼼하게 담고 있는 책이다. 당시 순우리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소중한 책이기도 하다. 
벼는 ‘벼 도(稻)’라고 해서 따로 기록해 놓았다. 조선시대 민중들은 나락인 벼를 기록할 때는 벼 도(稻)로 썼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한자 풀이에는 둘 다 나란히 벼로 쓰고 있다.
‘벼 화(禾)’는 ‘쉬, 슈, 수’로 읽었다. 그러므로 화력리(禾力里)의 발음은 쉬력리, 슈역이, 수역이로 했다. 수역리(壽域里)하고 화력리(禾力里)는 그 발음이 같음을 알 수 있다. 한자만 다를 뿐이다. 이렇게 새기 마을을 한자로 옮기면서 전혀 다른 뜻이 되어버린 것이다. 

● 새기 마을에 대한 근현대 자료
1911년도 발간한 조선지지자료에는 부평군 하오정면 원종리에 속한 마을인 수역리(壽域里)로 표기했다. 당시 원종리에 속한 마을은 원종리(遠宗里), 언담리(彦淡里), 수역리(壽域里), 신허리(新墟里)이다.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1919년도 지형도에는 수역리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땅이름만 표기하지 않았지 마을의 집들은 표기해 놓았다. 대략 10호  정도이다. 멧마루인 원종리에 비해 마을이 아주 작아서 표기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국립건설연구소가 발행자로 1963년도 12월 15일 인쇄한 1/25000의 지도(1963년 1월 1일 행정일)에는 수역이로 기록해 놓았다. 이후 국립건선연구소가 발행한 1970년, 1973년 지도에도 수역이로 표기해 놓았다. 한 번 수역이로 표기하자 내리 그대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지 조사를 통해 주민들로부터 채록해서 마을 이름을 기록하기 보다는 조선지지자료 같은 것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국립지리원이 발행자로 1976년도에 현지조사하고 1977년도 6월에 인쇄한 1/5000의 지도에는 쇄기로 표기되어 있다. 1975년도 지도에도 쇄기로 표기해 놓았다. 어느 기록에도 없는 아주 엉뚱한 이름이다. 새기가 쇄기로 센 발음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1977년도 이 새기 마을에는 70여 호에 이르러 마을이 제법 커졌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입구에는 특이하게 쥐사육장이 있었다. 새기 마을하고 새텃말 사이에 새마을 공장도 자리를 잡았다.
   
● 새기 마을에 대한 현대 기록의 역사 
1988년도 1월 10일에 인쇄한 부천시사에는 원종동을 소개하면서 새기 마을(9통, 11통)로 표기해 놓았다. 이는 당시 새기 마을 주민들에게 채록한 것을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최현수 부천역사연구소 소장이 1992년 12월 30일 인쇄한 부천사연구 1집에는 새기 마을을 제일 앞에 두고 ‘쇠귀, 수오귀’로도 부르고  있다고 표기해 놓았다. 이때 함께 수록한 지도에는 은데미하고 새기 마을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계산도 새기 마을 아래에 두어 제대로 된 현지 답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95년도 1월에 인쇄한 ‘우리가 살고 있는 오정구의 문화와 지명유래’에는 새기 마을을 전통 마을로 하고 쇠귀로 불리거나 수오귀로 불리기도 한다라고 명기해 놓았다.
함께 수록한 지도에는 새기 마을이 마을 위치에 제대로 표기되어 있다. 이때 새기 마을 건너마을이 은데미로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제대로 된 현지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당시 부천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한도훈이 집필한 2001년도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에선 새기 마을로 표기했다. 새기 마을에 살던 토박이 분들로부터 이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들었다.
한도훈이 집필한 2002년도 부천시사의 지명유래에는 새기 마을로 표기했다. 부천시사를 기초로 한 디지털부천문화대전에선 새기 마을을 기본으로 하고 ‘쇠귀, 수오귀’로 불리기도 하였다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수리(壽里)로도 불리웠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2005년도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부천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선 새기 마을을 기본으로 하고 쇠귀, 수오귀로 표기해 놓고 있다. 이는 부천사연구 1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 전국의 ‘새기, 쇠기, 수여기’ 마을에 대한 소개 
애초 새기 마을에서 출발해서 화력리, 수역리라는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먼저 전국의 새기, 쇠기, 수여기라는 땅이름은 찾아보았다.
경북 상주군 청리면 가천리 새기 마을이 있다. 경북 영일군 구룡포면 강사리에선 새기 마을을 ‘사지’라고도 부른다. 전북 진안군 부귀면 수항리엔 새기들이 있다. 부천 새기 마을 앞에도 새기보가 있었다.
경기도 김포군 통진면 가현리 쇠기들이 있다. 이 지역에선 통진두레놀이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전북 익산군 함열읍 와리에도 쇠기들이 있다.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성사리 살고지 동북쪽에 쇠기 마을이 있다. 여기에서도 부천의 새기마을과 마찬가지로 수여기, 수역이라고도 부른다.  충남 논산군 상월면 대촌리에 수여기 마을이 있고,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성사리에 수여기 마을이 있다. 이 수여기 마을은 쇠기 마을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전국에서도 새기, 사지, 쇄기, 쇠기, 수여기, 수역이로 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결코 한자로 수역리(壽域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새기 마을의 어원 풀이
화력리(禾力里)는 그 발음상 수역리(壽域里)하고 같아서 수역리(壽域里)가 전통 마을 이름이었는지 확인하면 된다.
‘쉬 화(禾)’ 자가 들어간 마을 이름으로 ‘수골 마을(禾洞)’이 있다. 충북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에 있는 마을이다. 이는 벼골이 아니라 수라는 말을 음차해서 생긴 현상이다.
김포군 고천면 신곡2리에 수기(禾基) 마을이 있다. 화기라고 발음하지 않고 수기로 발음한다. 여기에선 목숨 수를 써서 수기(壽基)로 쓴다. 또한 수기(帥基)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라는 음을 차용하면서 다양한 한자로 변형해서 쓴 것이다. 그 중에서 사람을 오래 살 게 한다는 의미인 ‘목숨 수(壽)’를 즐겨 썼다.  부천하고 가까운 인천의 만수동(萬壽洞), 연수동(延壽洞), 장수동(長壽洞)이 대표적이다. 옛마을에서 양반 같은 지도자급이 의도적으로 땅이름을 왜곡해서 목숨 수(壽)를 끌어들인 것이다.

수역리(壽域里) 한자를 풀이하면 ‘목숨의 경계에 있는 마을’‘목숨이 이어지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즉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새가 수’로 바뀐 말을 음차해서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다른 말인 ‘쇄기, 쇠기, 수오귀’는 새기에서 출발한 말이다. 새기 마을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수역리라는 엉뚱한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새기 마을 이름하고, 수역리를 다시 우리말로 받아쓰면서 마을에선 혼란이 일어나고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하게 표현한 ‘쇄기, 쇠기, 수오귀’라는 땅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새기 마을은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는 터전, 마을’이라는 뜻이다. 새는 마을과 마을 사이, 산과 산 사이, 들과 들 사이 등으로 쓰인다. 보통은 이 사이라는 뜻의 새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신(新), 사(沙), 석(石)’ 등으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목숨 수(壽)’라는 엉뚱한 말이 끼어든 것으로 보인다.

새기 마을은 멧마루인 원종리하고 은데미인 언담리 사이에 끼인 마을이다. 그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터 기(基)’가 지경 역(域)으로 바뀐 것이다.
새기 마을은 우리말인 새하고 한자인 기(基)가 혼합해서 생긴 말이다. 애초에는 벌응절리 옆에 있는 사래울하고 같은 의미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새울이나 새말 정도가 아니였을까 싶다.
‘사이’라는 의미로 쓰여진 땅이름은 전국에 셀 수 없이 많다. 새기, 새넘이, 새냄이, 새드리, 새들, 새모실, 새미골, 새밭, 새뱅이, 새암재, 새터, 새말, 새몰, 새터몰, 샛골, 샛굴, 새실, 샛목 등이 있다.
결론으로 새기 마을을 수역리로 다시 부르자는 것에는 정말로 의미없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더더구나 딱 한 번 기록으로 남겨진 화력리(禾力里)를 부활하자는 말은 더더욱 안 될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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