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리꿀의 의미
가리꿀은 거칠개 나루터 동편으로 원종2동주민센터에서 평화주택, 보령주택, 청실 빌라 등이 위치한 골짜기를 일컫는다. 현재는 원종 141번지, 성오로 127번길 일대이다.

▲ 가리꿀 지역

능미 줄기가 이곳까지 뻗어와 만든 골짜기이다. 능미가 경인고속도로 건설로 원종, 성곡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원래는 한줄기였다. 능미 자락을 깊게 파서 다른 지역과 평평하게 고속도로를 만든 것이다. 지금 같으면 터널을 뚫어 공사를 진행했겠지만 1968년도 완공한 시절에는 그저 산을 깎아내려 속전속결로 만드는 게 박정희 정권의 국가시책이었다.
가리꿀로 일제강점기 전에 만들어진 수돗길이 지나고 있다.
가리는 갈대의 고어이다. 굴은 골짜기를 가리킨다. 이곳에 갈대가 무성한 작은 골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갈굴이 가리굴로 바뀌고 이것이 세게 발음하다 보니까 가리꿀로 변한 것이다.
방아가리, 가리꿀로 같은 땅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이 일대에는 갈대가 아주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갈대는 그 쓰임새가 많았다. 부천에선 멧마루, 고리울, 밖오시, 대장마을, 오정마을, 시우물, 내촌마을, 약대마을, 겉저리, 장말, 사래이, 구지말 등지에 갈대가 많았다.
봄에 갈대잎이 부드럽게 푸르러지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갈대밭으로 소를 몰고 나왔다. 갈대는 소먹이로 으뜸이었다.
겨울철엔 땔감으로는 그만이었다. 멧마루 지역엔 그다지 높은 산들이 없어서 지천으로 있는 갈대가 밥짓는 데는 가장 요긴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산에서 나무하는 걸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가 너무 매서워서 나무를 할 수가 없었다. 해방 후에는 민둥산이 되어 산에서 나무하는 것이 가능치 않았다. 이때 갈대가 요긴하게 불을 때는 나무였다. 이 갈대를 베어낼 때는 자루가 긴 벌낫을 썼다.
부천 지역에선 갈대로 발을 엮어서 베르내, 고리울내, 붕어내, 구지내 등지에 막아 놓으면 참게가 많이 잡혔다. 이 참게를 가지고 게장을 담가 먹거나 튀겨먹거나 했다. 부천 전역에 참게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갈대로 헛간 이엉을 엮거나 울타리를 막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부천은 대부분 초가집이어서 농사에서 나온 볏집이 부족할 때는 갈대를 가지고 이엉을 엮였다.
또 갈대꽃을 꺾어서 빗자루를 맸다. 방빗자루로 갈대꽃빗자루가 그만이었다. 여러 개 매어 쓰고 몽당빗자루가 될 때까지 애용했다. 갈대꽃빗자루를 매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운 생계를 잇기도 하고 아이들 간식거리, 아이들 학자금을 준비하는데도 아주 중요한 생활비 공급처였다. 갈대꽃 빗자루는 방먼지를 쓸어내는 데에는 그 기능이 수수빗자루 등에 비해 탁월했다.
갈대로 유명한 순천만에선 갈대 뿌리를 가지고 갈대차를 만들어 판다. 갈대 뿌리는 예로부터 약재로 사용해왔다.

● 원종, 도당에 걸쳐 있는 산인 능미(陵尾)
능미는 매봉재를 건너고 아미산을 맞바라보면서 오른팔처럼 늘어진 산이었다. 베르내를 사이에 은데미, 계산과 마주보고 있었다. 높이는 1983년 국립지리원에서 인쇄한 지도에는 그 높이가 61.5m로 제법 높은 산이었다. 이때는 봉우리가 하나로 되어 있었다.
1996년도 국립지리원에서 인쇄한 지도에는 능미의 봉우리가 두 개로 높은 곳이 56.8m이고, 낮은 곳이 53.5로 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가마골에서 시작한 능미가 수돗길을 거쳤다. 이 능미를 휘돌아가며 베르내가 지나갔다. 능미가 아주 돌산이어서 바로 직선으로 통과하지 못하고 여월에서 내려온 물이 북쪽으로 꺽여져 휘돌아 간 것이다. 수돗길이 베르내를 건너면서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 위로 가리꿀을 형성해 냈다. 이 가리꿀로 수돗길이 지나간 것이었다.
능미의 북쪽에 거칠개 나루터를 만들어 놓고 서쪽엔 신기들이라는 낮은 산언덕을 만들어 놓았다. 오정마을이 있는 높이가 해발 21m에 달하는 덕산까지 능미의 산줄기가 이어졌다.   
이후 이 능미에는 산을 전부 깎아내고 도시화가 진행되어 산이라고 알려주는 것은 깎아지른 듯한 높이의 도로뿐이다. 또한 층층이로 지어진 아파트, 빌라들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능산(陵山)으로 우리말로는 능뫼로 되어 있다. 멧마루 마을, 새기 마을, 도당 마을, 성골 마을 등지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 산을 가리켜 능미라고 한다. 능미는 순우리말이다. 이를 한자로 다시 기록하면서 능미(陵尾)라고 한 것이다. 땅이름은 한자로 해석하면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는 미궁속에 빠지게 된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발견된다.
1995년 1월 발간한 ‘오정구의 문화와 지명유래’를 쓴 지은이는 이를 해석하면서 ‘능의 꼬리에 해당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여기에 무슨 왕릉이 있다고 꼬리에 해당할까? 뒤에 오는 미는 ‘미, 뫼, 메’로 산이라는 뜻이다. 꼬리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앞의 능은 ‘늘어지다’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까 원형은 늘미이다. 이 늘미를 한자로 옮기면서 능(陵)이 되었다. 늘뫼, 늘미가 능산(陵山), 능미(陵尾)가 된 것이다. 
능미는 다른 말로 돌산이라고 부른다. 돌산이어서 능미 꼭대기를 한 때 채석장으로 이용했다. 이곳 돌들을 깨서 집을 짓는데 사용했다. 1977년도 국립지리원에서 인쇄한 지도를 보면 능미 꼭대기에 거대한 채석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채석장은 현재 부천시립북부도서관인 당시 근화제약 동쪽 편으로 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해서 양쪽에 있었다.

▲ 도당동 채석장

부천에 돌산이 멀미의 여월쪽 골짜기와 고얀의 바우백이, 그리고 여월의 능미밖에는 없었다. 돌이 많아 돌산으로 명명된 것은 조선시대 이후의 일로 여겨진다.
능미는 그 가운데로 경인고속도로가 관통한 바람에 한쪽 팔을 잃고 말았다. 이 경인고속도로 위를 가로질러 도당교가 설치되어 있다. 능미의 정상 부근은 침엽수인 소나무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나머지 지역은 야산으로 풀과 나무들이 뒤섞여 있었다. 능미 동쪽 멧마루, 새기마을 쪽에는 드넓게 들판이 만들어져 많은 농사를 지었다.

● 원종양수장
멧마루에서 농사를 짓는 일은 힘겨운 노동이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자연농법으로 고리울내, 베르내를 중심으로 보를 막아 그 물을 이용했다. 그런데 보를 막아 짓는 농사는 너무도 힘겨웠다. 물지게로 일일이 저날라야 하거나 용두레로 퍼올렸다. 논들도 삐툴빼툴해서 물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지주, 친일지주들을 중심으로 부평수리조합을 결성하고 굴포천 하구를 댐으로 막아 서해조수 역류를 막았다. 굴포천변에 펼쳐진 대장들, 오정들, 멧마루 지역 방우리들, 중동들에 물을 대기 위해 한강물을 끌어들였다.
한강물은 동서로 나뉘어 수로를 만들었다. 동쪽에 있는 수로를 동부간선수로, 서쪽에 있는 것을 서부간선수로라고 불렀다. 부천지역은 동부간선수로로 대장마을을 거쳐 구지말까지 연결되었다. 이 동부간선수로에서 각 들로 물을 공급하는 지선이 건설되었다.
멧마루 방우리들 지역에는 한강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이 지선만으로는 부족했다. 지대가 높아 물 공급을 바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지선이 설치되지 못했다. 해방 후에야 지선을 설치하면서 그 시작점에 양수장을 건설했다. 멧마루 원종양수장이 건설되고 이곳에서 물을 퍼올려 방우리들에 있는 논들에 물을 댔다.

▲ 옛원종양수장 웟부분

한강농지개량조합에서 발행한 한강농조 60년사에 따르면 원종양수장은 1952년도에 건축한 것으로 나와 있다. 원종양수장 건물 한 채, 원종양수장을 관리하는 관리동 한 채였다.

▲ 옛원종양수장과 관리동

예전 원종양수장은 대장마을 동부간선수로에서 연결한 지선에서 물을 퍼 올리기 위한 파이프가 연결되었다. 1층에는 양수기가 설치되어 양수기를 돌리면 지선에서 물이 퍼올려졌다. 원종양수장에 지붕도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는 2007년 양수장 개축 사업의 일환으로 원종양수장 건물이 헐어지고 새로운 양수기가 설치되어 있다. 그 옆의 관리동은 허물어 버리고 공터로 변모시켰다.

▲ 현재의 원종양수장 모습

원종양수장은 원종동 22-1번지에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김포지사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원종양수장이 설치되어 현재의 양수기로 바뀌기 전까진 진공펌프로 양수하였다. 이 양수장을 관리하는데 기사 1명, 보조기사 1명이 있었다. 멧마루 지역으로 끌어올려지는 물관리를 위해 원종동에만 수리관수 3명이 돌아가면서 관리를 했다. 오정들에는 수리관수가 1명, 대장들에도 수리관수가 1명인데 비해 2명이나 더 많았다. 그만큼 물관리가 어렵고 까다로웠다. 대장들이나 오정들은 수문만 열어두면 동부간선선수로에서 물이 뻗어나갔지만 멧마루 원종동 지역은 양수기를 돌려야만 물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여름철 논에 물공급을 많이 해야 할 때에는 야간에도 양수기를 돌려야 해서 수리관수를 더 둔 것이다.

▲ 원종동 농수로

현재는 기사는 없고 기계관수(機械灌手) 1명이 관리를 하고 있다. 여기에 수리관수(水利灌手) 2명이 양수기를 돌리고 있다. 이중 1명은 오정동을 관리하고, 다른 1명은 대장동을 함께 관리한고 있다. 인력을 줄이는 추세이기도 하고, 그만큼 도시화가 진행되어 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 공급을 해야할 논이 적어져서 그만큼 물 공급이 줄어들었기에 굳이 야간까지 양수기를 돌리지 않아도 된 것이다. 
방우리들에 연결된 동부간선수로 지선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지선을 처음 만들 때는 멧마루 사람들이 힘겨운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소나무를 베어와서 말목을 박고 삽과 가래로 진흙더미를 파내서 수로를 만들었다. 그렇게 지선을 만들고서야 겨우 물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이 수로를 콘크리트로 타설을 해서 단단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이 콘크리트 수로로 물을 공급하고 있다.
현재도 동부간선수로를 통하고 원종양수장을 통해 공급된 물로 방우리들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방우리들에 행복주택이 지어지면 이 수로도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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