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인문기행>

 

  법당도 없고 일주문도 없던 시절, 운주사 골짜기를 지킨 것은 수많은 불상과 석탑이었다. 층층이 일구어놓은 다랑논엔 신비로운 형상의 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골짜기 가장자리 산기슭에는 크고 작은 석불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농부들은 쟁기질하다 말고 잠깐 석탑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막걸리 한 사발로 흐르는 땀을 씻었다. “이 농사지어 부모님 봉양하고 처자석 먹여 살려야 한께 제발 풍년들게 해 주씨요.”그럴 때면 여물을 씹는 소의 풍경소리가 석탑을 맴돌아 멀리 와불(臥佛) 님의 귓가에 가 닿았다. 아낙네들은 밭고랑을 매다 말고 석불님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신세타령을 했다. 시집살이 혹독한 씨엄씨 이야기도 하고, 인정머리 없는 시누이 이야기도 하고, 짜잔하기 이를 데 없는 서방님 이야기도 하며 옷고름에 눈물을 찍었다. “서방 복 없는 년이라 자식 복도 없는갑쏘.” 그럴 때마다 부처님은 가만가만 아낙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부처님은 오장육부 깊이깊이 숨겨놓은 속말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허물없는 친구였다.

 

 

  좋은 날도 있었다. 봄부터 시작된 고된 농사일이 어느 정도 끝나고 들판에 황금빛 향연이 시작되는 팔월 한가위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운주사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그날만큼은 반상의 차별도 없고 남녀노소의 구별도 없었다. 저마다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석탑을 참배하고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 다 함께 어울려 술과 음식을 나누었다. 남정네들은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신명을 냈고 여인네들은 사뿐사뿐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럴 때면 부처님도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아이들은 산꼭대기에 누워계시는 부처님 바위에 올라가서 미끄럼을 타고 놀았다.

  경자년(2020) 음력 정월 초사흘, 운주사 골짜기가 훤히 내려다뵈는 불사 바위 위에 앉아서 대웅전도 없고 일주문도 없던 시절의 운주사 옛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운주사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운주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신라 때 도선국사 창건설, 나말여초에 능주 지방 호족 세력 창건설, 민중 건립설, 이민족 건립설, 혜명 도중(徒衆)설, 장보고 추모세력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하지만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그 많은 탑과 불상을 세웠는지, 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비밀은 풀리지 않고 있다.

 

 

  운주사 입구에 서면 가장 먼저 ‘파격(破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웅장한 산세도 없고 장엄한 물소리도 없는 그저 평범한 골짜기에 터를 잡았다. 오래된 사찰이면서면서도 절 입구에는 부도며 탑비 같은 유적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대웅전, 일주문 등 모든 건물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들이고 천년의 역사를 입증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골짜기와 주변 능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석탑과 석불뿐이다. 석탑은 전통적인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고 예술적인 완성도도 높지 않다. 대다수 사찰은 대웅전 앞뜰에 한두 기의 석탑이 있는 것이 고작인데, 운주사는 모두 21기의 석탑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석불들은 또 어떤가? 골짜기 이곳저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90여 구의 석불들은 그 엉성한 솜씨며,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진 모습들이 차마 부처님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다. 서쪽 능선에는 일곱 개의 잘 다듬은 바위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해 놓은 칠성바위가 있고, 그 위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운주사 최고의 미스터리, 누워있는 돌부처의 모습이 보인다. 흔히 와불(臥佛)이라고 부르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화순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和順雲住寺臥形石造如來佛)이다. 도선국사가 하룻날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고자 했으나 공사가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꼬끼오”하고 닭 소리를 내는 바람에 석수장이들이 모두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결국 와불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 누워있는 부처는 본래 좌상과 입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는데 기술적인 문제에 부딪혀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남게 된 것으로 일종의 미완성 불상인 셈이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온갖 신비로운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이 미완의 불상은 어느덧 운주사 최고의 석불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운주사 골짜기의 이렇듯 수많은 불상과 석탑은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든 것일까?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 4번, 학술조사 2번을 실시한 결과를 보면 운주사는 창건 시기가 대략 11C 초로 추정되며, 세 번의 중창을 거쳐 임진왜란 이후인 17C 초에 폐사되었다. 본래 대웅전은 계곡 입구 좌측에 있었으며 약 300년 동안 폐사된 채 방치되었다가 1918년에 박윤동(朴潤東) 군수 등 16명의 시주로 중건되었다. 현재의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은 모두 1990년대 이후에 지어졌다. 문헌상으로는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동국여지승람』 권 40, 「능성현」 조에 ‘천불산(千佛山)은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니 좌우의 산등성이에 있는 석불과 석탑이 각각 1천 개이다. 또 석실(石室) 둘이 있어 석불과 서로 등지고 앉았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운주사에 각각 천 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42년 조사 때 석불 213구와 석탑 22기가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실제로 천 기의 석탑과 천 구의 석불이 있었다기보다는 많은 숫자의 탑과 불상에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더 합리적일 것 같다. 전남대 박물관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탑과 불상들은 한꺼번에 만들어졌다기보다 중창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탑과 석불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주사 천불천탑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누구는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천불천탑을 세웠다고 하고, 누구는 왕이 날 명당자리라서 그 혈을 누르느라 천불천탑을 세웠다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운주사(運舟寺)를 ‘피안(彼岸)으로 가는 배’로 여긴다. 그럴 경우 석탑은 돛대가 되고 석불은 사공이 된다. 누워있는 부처가 일어서면 미륵 세상이 온다고도 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도 한다. 시인들은 다투어 운주사를 노래하고 소설가들은 미처 우리가 알지 못한 천불천탑의 비밀들을 끄집어낸다. 그러는 사이 운주사는 점점 더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구름 속의 절[雲住寺]’이 되어가고 있다. 오는 봄에는 운주사에 가서 그 신비로운 천불천탑의 세계 속으로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