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1987 그날 민주화운동가념사업회 기획 / 유승하 만화

하루 종일 TV에서는 장송곡이 나오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왼편 가슴에는 검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농담을 하거나 웃을 수 없는 짙은 슬픔이 온 나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의 어린 눈에도 온 국민이 충격과 슬픔 그리고 두려움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철없는 어린 아이들조차 뛰어 놀면 혼나는 분위기였다. 국부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것도 부하의 총탄에 말이다. 우리를 잘살게 해주시려 불철주야, 노심초사 하셨던 분, 나라를 사랑하셔서 양주와 양담배조차 금하셨던 분, 농번기에는 고생하는 농부들을 찾아가 막걸리를 나누며 검소하게 사셨던 분, 새마을 운동을 통해 낡은 정신을 일깨우고, 5개년 경제계획을 세워 강하게 밀고 나가며 나라를 번영으로 이끌던 분이 아닌가? 조국을 위해서는  영원히 대통령을 하셔야 했던 분이 돌아가신 것이다. 초3 어린 마음에도 너무나 슬펐고 우리나라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초3 학생에는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존재하는 묘한 분위기였다.

장례식 이후 군복을 입는 믿음직한 장군이 TV에서 사건을 설명하고 나라의 안정을 위해 여러 조치들을 발표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예배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초3의 마음에 ‘나라가 망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든든함이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라도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이를 잘 진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훌륭한 장군이 대장으로 진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허나 군인으로 있지 말고 대통령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마음을 알았는지 11대 대통령에 이어 12대 대통령까지 이어졌다.

임금은 하늘에서 낸다고 어른들이 말한다. 임금에게 흠이 없을 수 없지만 흠을 말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반역이다. 백성의 역할, 백성의 복은 임금이 성군이 되길 기도하는 것이며, 임금 노릇하기 불편하지 않게 잘 모시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들 배곯지 않게 하면 더욱 바랄 것이 없는 것이지 임금이 하시는 일에 불평이나 반기를 들면 안 된다. 애당초 백성들은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 그건 다 고위 관료님들이 알아서 하는 일이다. 그냥 밥술이나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대통령은 오늘의 임금과 진배없다. 대통령도 하늘이 낸다. 우리와 급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비판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지, 또 우리가 알면 뭘 알겠냐? 괜히 잘난 척 하다가 눈 밖에 나면 인생이 꼬인다.

허나 이제 알았다.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지, ‘잘 살아보세’를 외치면서 가난에서 구제한 대통령이라는 탈을 쓰고 이 나라를 개인 왕국으로 만들고 국민들 사이에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을 알았다. 뒤를 이어 전두환 신군부는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라의 주인은 대통령이나 정권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민심이 천심이다. 하늘이 국민이고 국민이 곧 하늘이다. 국민의 뜻이 하늘의 뜻이다.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법에 위에 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내놓으라’ 고 외친 항쟁, 그리고 결국 깨어있는 시민들과 함께 쟁취한 우리 현대사의 빛나는 사건이 1987년 6월 항쟁이다. 젊은 청춘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도 하겠다고 외친 ‘호헌철폐, 독재타도’가 대통령 직선제를 가져왔고 결국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빚어가는 가장 큰 변곡점이 되었다. 청춘들의 희생에 함께 정의롭게 분노했던 수많은 시민들과 거리에서 함께 했던 자랑스러운 기억은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 딸들에게 들려줄 아빠의 몇 안 되는 자랑이다.

두 딸에게 만화 <1987 그날>의 주인공은 아빠라고 하며 건네준다. ‘아빠가? 정말?’이라고 하는 딸들을 보면서 훗날 딸들은 자신들의 딸들에게 추운 겨울 아빠와 함께 했던 촛불집회를 말해주겠지. 역사는 이렇게 빚어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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