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가 생각하는 아주 간단한 도식.
평등 = 민주주의 = 더불어 돌보기 = 이것이 페미니즘.

 

 어느 여름 콩나물신문 김재성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함께 있던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콩나물신문에 보내주면 좋겠다는 말에, 글을 한 편 보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디디통신을 쓰고 있다.
 여성인권단체 활동가로 일하면서, 단체 소식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통신이라는 제목을 달아, 연재를 시작했지만, 번번이 마감 일자를 놓치며, 서툰 문장들을 보내곤 한다. 오늘 밤도 그런 날이 되겠다. 일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와 책상 앞에 앉았으나 유난히 시작이 어렵다.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말들이 있는데 글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딱 3년을 이렇게 단체 활동가로 보내고 나면, 페미니즘에 대해,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게 어렵고 또 복잡하다.

 김재성 선생님을 만난 자리는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자의 강연이었다. 강연의 영향도 받은 터라, 그 즈음 나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이 평등, 민주주의이며 이 둘을 통해서 서로 돌보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단정했다. 전제가 이렇게 되자, 평등과 민주주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면, 분노가 일어나곤 했다. 이런 성격을 다혈질이라고 하나? 감정을 보살피는 것이 어려웠다.
 말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행동한다는 것은 차이를 바탕에 두고 수행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것이 어느 존재에게는 무시로, 존대로 귀결되면 안 된다. 이것이 인권을 바라보는 나의 틀이었다.

 부천여성의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소에서, 여러 형태의 여성 폭력 사건을 접하면서 가해와 피해의 차이를 목격하며, 피해자에게는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존중과 응원을, 가해자에게는 엄벌과 비난을 바랐다. 여성주의에 대한 나의 틀은 가해와 피해, 이 둘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이러구러 3년이 지나도 여성주의자라고 드러내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생각의 바탕들을 검토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주의 인권활동가든, 여성주의 상담활동가든 여성주의 철학을 기초로 활동해야 한다고 하는데, 여성주의 철학이란 무엇이지?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여성주의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왜 나는 디디통신을 쓰지? 등등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것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하였다. 질문의 방향을 나를 향해서,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이 과연 내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철학이라는 말은 희랍어 필로소피아에서 왔다, 필로는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소피아는 지혜의 의미이기 때문에 철학이라는 말은, 지혜사랑, 한문투로 한다면 애지(愛智)로 번역되었어야 했단다.1)

 여성주의에 대한, 여성주의 지혜에 대한 사랑을 여성주의 철학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내 세계를 여성주의로 해석하고 싶은 것일까.
 고민이 많아지자 예전 생각도 났다. 이건 내 욕망인가? 타인의 욕망, 특히 부모의 욕망을 주체화한 것 아닐까, 이 욕망이 진짜냐, 가짜냐 속앓이 하던. 그때에 공부를 이끌어주시던 선생님이 싫어졌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답답했다. 여성으로 산 경험들이 소외된 채 주체를 말하는 것에 질리곤 했다.

 

 그러나 문자로 된 여성주의는 어려웠다. 도서관에서 번역된 가야트리 스피박 소설을 겨우겨우 다 읽고 나오며, 스피박이 말한 대로 나란 여성을 하위주체로 단정했다. 사회적 가족을 구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남자 선생님과의 연을 끊고, 여성주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다.
 여성주의 세계로 항해? 여행? 이런 느낌으로. 마치 형이상학적 세계를 꿈꾼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 여성주의 세계, 이미 만들어진 그런 세계는 없다. 여성주의 가치 중심적 언어와 행동의 과정, 그 영향이 있는 것이지, 본질적이고 완성된 세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리오타르는 철학하는 행위를 욕망을 통해 이야기한다.2) 늘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결핍 속에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주의 철학을 해 보자는 마음이 좀 쉬워진다. 우선 나란 여성의 욕망에 온전히 따라가 보기, 욕망에 머물러 보기. 내 욕망이 과연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책 <리오타르, 왜 철학을 하는가?>

 “욕망이 있기 때문에, 현존 속에 부재가 있기 때문에, 생체 안에 죽음이 있기 때문에, 또한 아직 권력이 아닌 우리의 권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얻었다고 생각한 것이 소외되고 상실됨으로써 사태와 행위, 말해진 것과 말하기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기 때문에”라는 리오타르의 말을 통해 생각의 여행? 항해? 채비를 한다. 굳이 철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지금까지의 생각에 질문을 던져보고, 생각들을 의심해 보고, 생각하던 방식을 바꿔보면서.

 지난번과 같이 어수선한 글이다.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당신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고, 서로 돌볼 수 있을 때, 그것이 삶에 대한 진지함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한다. 디디가 생각하는 아주 간단한 도식에 평등 = 민주주의 = 더불어 돌보기 = 대화 = 이것이 페미니즘.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대화 가능한 사람, 페미니스트.
 
 다음 달부터는 ‘디디통신’을 내리고 ‘디디생각’으로 글을 싣고 싶다. 왜 여성주의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싶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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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용옥, 논술과 철학강의 2, 통나무

2)장 프랑스아 리오타르, 리오타르 왜 철학을 하는가, 북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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