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친구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글쓴이 : 이우기
1983년부터 3년 동안 미몽(迷夢)에 잠겨 있던 모교이다. 그 시절은 어땠을까. 국어, 영어, 수학 이렇게 세 과목을 돌아가며 매주 월요일 한 과목씩 주초고사를 봤다. 영어는 성적에 따라 선생님께 손바닥 또는 엉덩이 맞는 시간이었다. 수학은 25문제에 한 문제당 2점씩 50점 만점이었는데 2점을 ‘획득한’ 적도 있다. 국어는 50점 만점에 40점 이상은 줄곧 했던 듯하다. 나중에 국어국문학과 갈 싹수가 보였던 것일까. 친구 따라 <하이라이트수학> <대문수학> <수학의 정석> <정음영어> <성문기본영어> <맨투맨영어> 따위 참고서, 문제집을 사곤 했다. 하지만 제대로 공부되지 않았다. 자습지를 매일 냈다. 수학 문제를 풀든, 영어단어를 쓰면서 외우든 어쨌든 공부한 흔적이 남은 연습장을 매일 제출했다. 볼펜 두 개를 들고 영어단어를 쓰기도 했고, 친구 것을 빌려 내기도 했다. 악착같이 시켰고 억척스레 해냈다.

글짓기를 좀 했는지, 1학년 때 무슨 글짓기 대회에서 상품으로 만년필을 받은 적이 있다. <하야로비>라는 문학동아리 활동도 했다. 강찬일, 백수인, 권오현, 이한수 같은 이름이 떠오르는데, 맞는지도 자신이 없고 다들 어찌 사는지도 잘 모르겠다. 작품집을 내었던 것 같은데 기억에 자신이 없다.

2학년 때는, 당시로서는 거의 불법적이던 학급문집 <둥지>를, 지금 진주고등학교 국어 선생인 이재욱과 주도하여 내었다. 이재욱과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2인 문집을 낸 적도 있다. 그 문집들은 지금은 집에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3학년 때, 스승의 날에 목소리 좋은 친구 안성달이 오민대에서 낭독하던 <사도예찬>(師道禮讚)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졸업 후에도 스승의 날에 낭독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은 어쩌는지 모르겠다.

아침 6시 30분 집에서 나서 우리 동네에 세워져 있던 스쿨버스에 1번 손님으로 탔다. 어떤 때는 기사 아저씨를 기다렸다. 밤 10시 30분 야간자율학습 마치는 종 치기 10분 전부터 책상 위에 책 한 권만 놓고 있다가, 땡 하면 잽싸게 가방 들고 달려 내려갔다. 스쿨버스 자리에 앉아 있으면 무릎 위로 가방이 대여섯 개씩 쌓이곤 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그날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과 내일모레 다가오는 시험 이야기들을 하면서 집으로 가곤 했다. 연탄불로 끓여주시는 설익은 라면을 간식으로 먹고 12시 넘게까지 숙제하고 공부했다. 하지만 내 성적은 65명 중 30등 안팎이었다. 선생님은 4년제 대학 가려면 죽자하고 열심히 하라고 다그쳤다.

 

토요일, 일요일도 학교에서 살았다. 머리 깎을 시간도 모자라고 목욕탕 갈 시간도 넉넉지 않았다. 일요일 새벽 5시쯤 목욕탕 구석에서 때를 밀고 있으니 웬 아저씨가 “학생, 고생이 많구나.”하시며 등을 밀어주었다. 때가 많이 나와 부끄러웠다. 엉덩잇살이 뭉개진 것을 보고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버텼다. 동생은 나를 보며 인문계 고등학교를 포기한다고 했다. 간혹 일탈하는 친구도 있었다. 자율학습 시간에 당구장 가는 건 귀여운 것이고, 일주일 정도 가출하는 것도 용서되었다. 졸업하는 날 선생님께 험한 말을 내뱉는 친구도 있었다. 그들은 어쨌든 끝까지 버텨낸 것이다. 중간에 그만둔 친구에 견주면 훌륭하다 해야겠지.

꿈이 뭔지,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고민할 겨를조차 저당 잡힌 청춘이었다. 어른들은 교육제도를 바꾸고 교과서를 바꿔가며 나라의 미래와 학생들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주겠노라 말했지만, 그말을 우리는 들을 수 없었다. 우리 생각은 묻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친구들이 있어서 즐거웠다. <별밤>을 들으며 웃고 울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견뎌낼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3년 동안 견디는 법, 버티는 법을 배웠을까. 또는 견뎌야 하는 당위와 버텨야 하는 당위를 배웠던 것은 아닐까.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