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크고 눈이 똥그랗다. 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오늘은 목소리가 허스키하다. 최은경 조합원은 이동용으로 스쿠터를 타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찬바람을 맞아서 그렇단다.

뜬금없지만, 어제는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오정구 체육대회에 다녀왔죠. 구마다 구민체육대회를 하는데 올해는 오정구가 제일 늦게 했어요. 미리 힘 좋고 쟁쟁한 선수들을 선발해야 하는데, 당일에 뛸 사람이 없었는지 계주와 오재미 놀이, 승부차기를 다 해서, 힘이 좀 들었어요,

구민체육대회에 참여한 적인 한 번도 없는데, 신기해요.
오히려 내가 신기한데요. 체육대회는 매년 열리는데, 정말 한 번도 못 갔어요? 오정구는 7개 동에서 사람들이 모이는데, 동 예상인원이 100~150명이고 손님까지 하면 거의 700명 정도 모여요. 시의원, 도의원 다 오고요. 행사는 오정구청 직원들이 주체가 되어서 심판을 보고, 행사를 다 꾸립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참여하기 어려운 점도 있어요, 동마다 자생단체가 있는데, 한국자유총연맹, 새마을회 그런 곳이죠. 거의 10개 정도인데, 실지로 자생단체가 참여를 많이 하죠. 일반 주민이 오면 낯설긴 해요. 저는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죠.

마당발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언제부터 부천에 살았어요?
결혼을 97년에 했어요. 그때 IMF 사태가 있었죠. 청첩장 돌리면 욕먹을 때였죠. 강서구청 근처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1년 살다가 남편이 개인택시를 하겠다고 했어요, 결국 집을 판 돈으로 택시를 샀는데, 강서구에서 한 고개 넘어가면 집값이 반이라고 해서 부천 고강동으로 왔죠.

고강동이 낯설지 않았나요?
저는 어디 살아도 큰 상관이 없었어요. 결혼하고 첫 아이 낳은 게 24살인데, 저는 제가 아줌마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이웃주민과 소통도 거의 안 했죠. 내가 왜 아줌마들이랑 놀아야지 싶었어요. 아줌마 소리 듣느니 안 사는 게 났다 싶을 정도로 나이 먹는 게 싫었죠. 그런데 아이들 유치원 보내놓고, 유치원 아줌마들을 사귀면서 자연스레 아줌마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죠.

고강동 지역 자생단체인 ‘바르게 살기’에서 오래 활동한 걸로 아는데요. 거기엔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저는 부천에 살면서, 옆 동네에 친언니가 살고, 처제, 올케, 엄마, 아빠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아기 맡기고 어디 다녀오고 싶어도, 가족들이 시골에 멀리 있으니, 오로지 신랑밖에 없었죠. 신랑만 기다리고 삶이 싫고, 남은 시간에 봉사라도 해야겠단 생각을 했죠. 그러다 동네에서 광고를 봤어요. ‘바르게 살기’라는 봉사단체에서 신입 회원을 모집하더라고요. 제가 29살 때였어요. ‘바르게 살기’에서 지금까지도 젊지만, 그때는 정말 어렸죠. 어리다는 이유로 거의 10년을 막내 생활하고 총무일 하면서 궂은 일 다 했죠.

뭐가 좋아서 그리 오래 활동했어요?
바르게 살기 활동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요. 구 단위 회의, 시 단위 회의를 나가면서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저런 직장도 있고, 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재밌고 신기했어요. 궁금한 것도 많아져서 활동을 하려면 똑똑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건의하던 프로그램을 만들던 하나라도 더 배워야겠다 싶었죠. 그리고 목숨 걸고 시의원이나 시장, 국회의원 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도대체 뭘 하고 싶어서 그러는지 궁금했어요.

‘바르게 살기’를 자생단체라고 하는데 보수단체로 보는 사람들도 있죠?
지역에서 활동해 보니 보수단체는 한국자유총연맹과 새마을회, 통장이 그런 것 같아요. 통장은 급여 20만 원 받아서, 동에서 부르면 동네 일을 해야 하죠. 준공무원이라도 봐도 손색이 없어요. 바르게 살기나 자연보호협의회는 위원장에 따라서 다를 수는 있어요. 바르게 살기는 주로 캠페인을 하죠. 자연보호는 쓰레기 줍고, 산 가꾸는 활동을 위주로 하는데, 우리 단체를 소개하면 이름을 보고 “무슨 소리야?” 해요. “바르게 살려고 들어갔나?”라고 묻죠. 그러며 “하도 못되게 살아서 바르게 살려고 바르게 살기에 들어왔어요.”라고 해요. 요즘엔 이런 자생단체들이 다 힘들어요, 진짜 일 할 사람이 없어요, 일단 평일에 행사가 너무 많고요. 내가 돈까지 내 가면서 그런 활동을 해야 하느냐는 인식이 많죠, 맞벌이도 많고, 하는 사람들도 다들 힘들다고 해요. 제가 알기에는 새마을부녀회는 없어진 데도 많아요. 사람이 없어서, 맥이 끊겼죠.

고강동에서 성곡동으로 이사와 주민자치 위원이 되고, 참여예산 활동을 하늘 걸로 알아요. 일은 어떠세요?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죠. 제가 한 달 동안 주민자치 위원 양성과정을 들었는데, 너무 정체되어 있어요. 물갈이가 안 되죠. 그러니깐 나이는 있고, 고문은 많은데, 행사 때 실제로 일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디나 젊은 사람 1~2명이죠. 주변에서 이런 일 한다고 하면, “얼마 받고 일 하느냐?”라고 물어봐요. 그거 하면 뭐 주느냐? 저희 신랑도 밥이 나오느냐, 떡이 나오느냐를 입에 달고 살죠. 마을 만들기 같은 것도 아쉬워요. 동에서 3천만 원이 내려왔다면서 길거리 청소하고 화분 가져다 놓고 그래요. 가끔은 그 돈이 진짜 아깝다는 생각이 확 들어요. 가정에서는 카드 쓸 때 벌벌 떠는데, 시 예산은 내 돈도 아닌데, 아낄 수도 없어요. 호미를 만 원 주고 10개 산다고 하면 만 원에 사야 하죠. 8천원 에 살 수가 없죠. 그게 더 환장하겠어요.

앞으로 제일 하고 싶은 게 궁금하네요.
청소년 지도사를 공부하고 있어요. 꼭 합격해서 복지관이나 청소년 수련관에서 일하거나 청소년을 위한 모임을 직접 만들려고 해요. 요즘에 참여예산 공문만 나오면 올리는 게 있어요, 비어 있는 사무실을 임대해서 청소년 쉼터 해 줘라. 계획적인 거 체계적인 거 말고. 아이들이 그냥 놀 수 있는 공간요. 어른들은 지갑에 돈만 있으면 식당, 커피숍, 노래방 다 가죠. 친구들 만날 때, 길거리 벤치에서 만나자고 안 하잖아요, 하지만 애들 어디서 만나요? 밤 10시 넘으면 노래방에도 못 가요. 갈 데가 없죠. 외곽에 있는 아이들과 노는 게 꿈이에요. 제가 청소년 시기에 좀 놀아봤거든요. 시나 수련관에서 관심을 받는 아이들 말고, 밖에서 노는 애들과 함께 노는 일을 하고 싶어요.

끝으로, 콩나물신문사 이사이기도 한데, 콩나물신문은 어떤가요?
일단은 임시총회까지만 이사를 하기로 해서 반반이 마음으로 시작했죠. 제 성격에 흐지부지하는 거 싫고, 중간에 탈퇴하기도 싫은데요. 사실 콩나물은 제가 유일하게 별로 못 어울리는 곳이에요. 마음이 안 가요. 따듯하진 않다고 느껴져요. 친한 사람끼리는 반갑게 하겠죠. 저는 동네에서 보면 콩나물 조합원들이 활동은 알게 모르게 열심히 하는 게 보여요. 하지만 아직 정이 안 들어서 그런지 활발하게 못 하고 있어요. 그리고 별로 해 달라는 것도 없죠. 그냥 돈만 내다가 끝내지 싶기도 해요. 처음에는 기대가 컸는데요, 뜻밖에 민숭민숭해요. 실제로 사람을 감싸고 한 명이라도 더 품으려는 노력이 안 보여요.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이 중요하죠. 텃세도 느꼈고요. 조합이 생기고 나중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한 각별한 배려가 필요할 거 같아요.

 

마지막 질문에 답을 듣고, 뜨끔했다. 신입 조합원이 왜 안 오느냐고 걱정하면서, 막상 새 조합원이 오면 우왕좌왕한다. 초창기에 시작한 조합원과 나중에 온 조합원은 많이 다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최은경 조합원은 인터뷰를 마치자 목소리가 다시 돌아왔다며, 카랑카랑한 소리로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한다. 스쿠터를 타고 가는 곳은 다시 동네 회의다. 아줌마라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다는데, 이제는 주민자치위원, 참여예산위원이라 불리며, 어느새 공적인 세계에 당당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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