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부천 이야기 <4>

경인고속도로로 갈라진 봉배산을 연결하는 구름다리

◆ 부천에서 유명해져야할 산 

부천에는 멀미, 성주산, 도당산, 할미산 이외에도 여러 산들이 있었다. 지금은 조그마한 산들이 다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 빌라, 다세대 주택들이 들어서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그 중에서 용케 살아남은 산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해발 86미터인 봉배산(鳳倍山). 봉배산은 부천에서 유명해져야 하는 산이다. 부천시민이라면 필히 알아두어야 할 산이기도 하다. 부천의 뿌리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부천의 뿌리라? 부천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을 그 뿌리로 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무려 7차례 발굴 조사로 드러난 청동기시대 움집이 21채나 이 봉배산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움집 한 채당 5명의 청동기인이 살았다고 가정하면 100여명이나 된다. 청동기 시대에 아주 큰 고을이 봉배산 꼭대기부터 중간 언덕까지 자리를 잡고 살았다. 부천 청동기인들의 삶터가 부천의 뿌리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돌덧널무덤 13기, 고려시대 무덤들, 조선시대 집까지 이곳에 있었다. 조선시대 온돌시설까지 발굴되어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부천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봉배산이다. 
 
다시 덮여진 적석환구유구 유적지
◆ 봉배산의 의미 
 
봉배산(鳳倍山)은 멧마루(원종)에서 간데미인 언덕을 거쳐 고리울을 거쳐 서울로 갈 때 보이는 야트막한 산이다. 그러니까 지도에 보면 원종사거리에서 나들이고개를 넘고 나들이 사거리를 지나는 원종로 끝자락에 솟아있는 고강선사유적공원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과 경인고속도로를 건너에 있는 산까지 포함한다. 
 
봉배산(鳳倍山)은 이름부터가 신령스럽다. 산이름에 봉황을 가리키는 ‘봉황(鳳)’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태양신에게 인간의 길흉화복을 묻기 위해 보내는 봉황이 살고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봉황(鳳)은 삼한 시기 이전에는 신과 인간을 매개해 주는 중요한 영물이었다. 선사시대 이후에도 ‘하늘과 땅,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새’로 숭배를 받던 봉황이다. 배(倍)는 태양신을 의미하는 ‘’에서 나온 말이다. 
 
봉배산 고강선사유적공원에 세워진 적석환구유구 모형
봉배산 꼭대기인 아주 중요한 유적이 있다. 적석환구유구(積石環溝遺構).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 때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祭壇)이다. 이 적석환구유구는 유적 한가운데에 잔돌로 쌓아 올린 적석시설(積石施設)이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며 도랑이 돌아간다. 이 도랑은 제단인 적석시설이 물에 씻겨 내려가거나 잠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제단인 적석시설은 말각방형의 평면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600㎝ 가량이고, 적석의 가운데 부분이 다소 불룩한 형태를 띤다. 도랑은 적석시설과 10m 내외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원형으로 돌아간다. 도랑의 지름은 도랑 바깥선을 기준으로 약 30m이며 전체 길이는 63m이다. 도랑의 서쪽 일부는 끊어져 있는데, 이는 출입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천신제를 지내기 위해 부천 청동기인 중에서 우두머리였던 제사장이 출입했을 것이다. 도랑의 폭은 3~4m 가량이나 경사가 급한 남동쪽은 1m 내외이며, 깊이는 약 80~100㎝ 정도이다.
 
봉배산 적석환구유구 제단의 적석 
이를 근거로 봉배산 선사유적공원에선 매년 청동기시대 천신제를 재현하는 고유제천의례(告由祭天儀禮)를 지낸다. 봉배산이라는 땅이름하고, 실제 발굴된 적석환구유구가 맞아 떨어지는 데서 땅이름의 유구한 역사성을 알 수 있다. 청동기유적지가 발굴되기 전에도 봉배산이라는 산이름은 고리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대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봉배산에서 고유제천의례를 재현하는 초헌관 
 
봉배산 고유제천의례에서 재현한 칠선녀의 가무
◆ 부천의 봉황에 얽힌 땅이름들  
 
봉배산을 다른 이름으로 명산(明山)이 있다. 봉배산에서 배(倍)가 태양신을 의미하는 ‘’에서 나온 말과 닮은 단어인 ‘밝을 명(明)’이다. 명산(明山)에서 ‘명(明)’은 ‘’의 훈차이며, ‘산’은 ‘미,뫼’의 훈차이다. 천신제를 지내던 산을 보통 ‘명(明)·광(光)’이라는 단어로 훈차한다. 
 
그러기에 미나 뫼로 불리웠을 것이다. 이것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명산이 된 것이다. 봉배산으로 불리기도 하고, 명산으로 불리기도 했을 것이다. 
 
봉배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멧마루(원종)에 봉안산(鳳鞍山)이 있었다. 지금은 다 깎여져 세창짜임아파트·대풍푸른들아파트·동문아파트·욱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여기에서 봉(鳳)은 당연히 봉황을 지칭한다. ‘안장 안(鞍)’은 ‘구르·기르·고르’로 바다나 하천의 고대어형이다. 따라서 봉안산은 봉황이 사는 산이 서해 조수와 접해 있는 의미로 풀이된다.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멧마루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에 설득력이 있다.  고리울 봉배산에서 둥지를 틀고 살던 봉이 날아와 봉천이골에서 물을 마시고 봉안산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봉배산의 봉(鳳), 봉천이골의 봉(鳳), 봉안산의 봉(鳳)이 삼각형을 이룬다. 이 삼각형의 지형은 고대 신앙과도 연관된 중요한 구도이다.
 
봉황이 물을 마시던 봉천이골의 모습
까치울(작동)엔 봉천이골이 있다. 옛날에 깨를 많이 재배하여 돈을 많이 번 봉천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어서 봉천이골이라고 설화가 전해 온다. 성곡중학교, 부천장애인복지회관이 들어서 있는 골짜기이다. 
하지만 이곳은 한자로 봉천곡(鳳泉谷)이다. 조선지지자료에도 실려 있다. 봉천이골은 ‘봉배산(鳳倍山)에 사는 봉황이 물을 먹던 샘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봉배산에 둥지를 틀고 있던 봉황이 목이 마르면 이곳에 내려 물을 마시고 되돌아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봉배산 청동기인의 제2호 움집터
◆ 봉배산 이름을 되새기길!
 
봉배산(鳳倍山), 봉천곡(鳳泉谷), 봉안산(鳳鞍山)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점말의 봉황골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이 세 곳을 깃점으로 해서 청동기시대 사람들, 그 이후 사람들의 삶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삶터에 잠들어 있었을 수많은 유물, 유적들은 경인고속도로를 좌우로 무차별적으로 택지개발을 진행하면서 지표조사 한번 시행하지 않고 그냥 불도저로 파헤쳐 버렸다. 청동기인들이 일상적인 생활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움집터도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애석할 뿐이다. 그때는 왜 이렇게 역사에 무지했는지 한탄만 거듭할 뿐이다. 
 
청동기인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봉배산에 등산객들이 무시로 드나든다. 발굴 한뒤 다시 덮어 놓은 움집터, 제단, 돌덧널무덤 위를 아무런 생각없이 지나친다. 
 
봉배산에 세워진 아카시아 나무의 솟대 
이제 등산하면서 봉배산이라는 이름 한 번 외쳐보거나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멧마루(원종)에 있는 오정초등학교 교가에 봉배산이 첫글자로 등장한다. 오정초등학교 졸업생들은 봉배산을 제대로 익혔으리라. 
 
봉배산 우뚝 솟아 정기 어리고
넓은 뜻 높은 희망 가득한 교정에
내일의 꿈을 안고 열심히 공부하고
꽃처럼 아름답게 우정을 나누리
여기는 우리들의 꿈을 가꾸는 터전
여기는 우리들의 사랑 동산 오정교라오.
 
봉배산에서 바라본 고리울, 멧마루 지역

글ㆍ사진Ⅰ한도훈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