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천은 시끌시끌하다.
기름내가 진동하고 떡을 돌리며 노래소리 가득한 잔치를 벌이느라 시끌벅적하면 정말 좋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 7월 7일.
 부천시청 브리핑 룸에서는 예외적으로 하루에 2건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오전에는 원종종합사회복지관의 복지사 이은주씨가, 오후에는 관장 홍갑표씨가 반박 기자회견을 했다. 보도자료 및 기자회견 내용이 지역신문에 거의 실렸으니 자세한 내용을 적지는 않겠다.

▲ 7월 7일 오전에 있었던 원종종합사회복지관의 성폭력, 인권침해 및 보복성 부당해고 고발을 위한 기자회견

 난 이은주 복지사의 친구로 기자회견을 보았고, 시청을 나서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처음 홍관장과 이은주씨가 일을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오늘의 사태를 짐작은 했을까? 홍갑표 관장과 이은주씨는 활동가이다. 물론 활동영역이 다르기는하지만 대중을 위함을 우선으로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홍관장은 이은주복지사에 대한 기대가 컸으리라. 그러기에 외부인사 영입에 대한 다른 직원들의 반대에도 이은주씨를 채용한 것이다. 도대체 문제는 무엇이며 해결책은 존재할까?

 

▲ 같은 날 오후에 있었던 같은 사안에 대한 원종사회복지관의 기자회견

 <원종종합사회복지관-이하 복지관이라 명>은 90년대 말 설립되었다. 영담 스님이 주지로 있는 석왕사에서 위탁받아 운영되었으니 15년을 넘게 지역사회에서 자리했다. 영담 스님은 민중에 대한 애착이 큰 스님으로 어린이집과 야간학교, 외국인 쉼터가 운영되는 석왕사의 주지다.
 그리고 석왕사는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곳이다. 지금이야 이런 일을 하는 종교단체가 많지만 그 당시엔 흔치않은 일이었다. 아마 부천시에서 복지관을 석왕사에 위탁한 것도 이러한 이유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며 석왕사엔 있고, 복지관에는 없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부처님의 자비로움이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연꽃이 상징인 것처럼 불교의 상징은 자비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나보다 약하고 못난이를 대할 때 업신여김이 아닌 측은하게 바라보는 따스한 마음이다.  
 그런데 복지관에는 그런 마음이 부족하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 중에 임산부를 포함한다. 그런 임산부를 모 부장은 ‘기관에 피해를 주는 가임기여성은 다 잘라버려야 한다’고 말했단다.
 임산부는 마음도 몸도 빨리 지친다. 자연 함께 일하는 사람의 일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다른 곳도 아닌 복지관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백보 양보해 설사 임산부 때문에 다른 이가 좀 피해를 본다 해도 잘라내야 하는 대상이 아닌 품어주고 함께 가야하는 존재이다.

 둘째, 민주정신이다.
 내가 아는 영담 스님은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가까이 있는 목사님이나 신부님께 축하 메세지를 전달한다고 들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듣고 이름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정말 멋진 스님이 계시구나 생각을 했었다. 나와 다른 이를 인정하고 안아주는 포용력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런데 문제 발언을 했던 모 부장은 문제제기가 들어오자, 농담으로 한 말이라며, 평직원에게 한 발언에 대해 사과를 하면 앞으로 부장으로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냐했단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누구에게도 의견을 말 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그가 직책이 다르던,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를 갖고 있던 예의를 갖추어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한다. 그게 내가 고등학교까지 다니며 배운 민주주의였다. 또한 민주주의 바탕에는 나와 다른 이의 생각에도 귀 기울여야한다.
 그리고 직책이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사과를 하면 권위가 떨어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나온 발상일까? 직책이란 업무수행과정 중에 역할과 책임의 차이라고 본다. 인격까지 직책과 동일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궁금증이 들었다.

 셋째. 시민단체의 존재유무이다.
 석왕사에는 생활협동조합이 있고, 노인대학과 마야야간학교, 아름다운 가게도 있다. 주지 한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가 아닌 마음이 같은 이들이 모여 크고 작은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생명이 있고, 협동이 있으며 사랑이 존재한다. 그래서 석왕사가 아름다운 절이고 찾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이번 사태에는 시민단체가 손을 잡고 가지 않는다. 처음 이은주 복지사의 기자회견 장면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단상에는 노동당 사람들만이 함께하고 있었다. 난 옆에 있던 ㅇㅇㅇ씨의 손을 잡아끌었다. 함께하자고. 물론 ㅇㅇㅇ씨나 내가 무슨 힘이 있겠냐만은 개인자격으로라도 옆에 서 주고 싶었다.
 처음엔 놀랐고 두 번째는 미안했다. 부천에는 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부천시민연합> <여성노동자회>가 있고 <비정규직센타> 등 많은 시민단체가 있지만 눈을 씻고 봐도 어디에서도 단체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찌보면 복지관과 노동당의 싸움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나중에 들으니 몇 단체에서 협의하려하였으나, 조재화 복지사와 이은주 복지사의 문제를 따로 떨어뜨려놓고 보고 있어서 이 번 기자회견에서는 빠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센타>나 <노동단체>는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지난 일요일에 이은주 지원대책위가 꾸려지며 함께하기로 했다니 다행으로 생각한다)

 만약 부처님의 자비로움과 민주정신, 시민단체와 함께 움직이는 석왕사의 마음으로 이번 일을 받아들였다면 복지관 사태가 이 정도까지 왔을까하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그리고 떠오르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복지관과 복지사

 복지관은 나보다 약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이고 복지사는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라고 알고있다. 십여 년 전, 아는 이가 나에게 복지사 공부를 권유한 적이 있다. 난 그 자리에서 거부했다. 나에게는 남에게 헌신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에 자신을 앞세움이 덧칠을 한다면 복지사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동료 복지사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지 못하고 거들어주려는 마음보다 마치 쓰레기를 치우 듯 “잘라 버려”하고 말한다면 그들을 찾아와 어려운 사정얘기만 한정없이 늘어놓으려는 이웃들에게 진정으로 따스함을 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런 복지관에 많은 이들이 과연 편안한 마음으로 드나들 수 있을까?

농담과 사과

 “가임여성을 잘라야한다” “아이를 가지면 책상을 빼겠다.” 이런 말들이 농담으로 오갔다. 조재화 복지사의 불편한 마음과 상관없이 일반 기업에서 제기되어도 큰 파장을 일으킬 이런 말들이 과연 복지관에서 농담으로 떠돌아도 아무 문제가 안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사과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자리에 관계없이 사과를 하면 무조건 받아들여야하는가?
 사과나 용서는 구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닌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아야한다. 그래서 사과 받는 사람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사과한 사람은 다소 불편하더라도 참고 기다려야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울 때 커다란 어른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다 울고 흐느낌조차 뱉어낼 때까지 아이의 손을 잡고 참아야한다. 그래야 여한이 남지 않는 법이다.
 단 한 번의 사과가 진정성이 느껴지면 두 당사자는 처음보다 더 가까워 질 수 있다.

선택과 동행

 이번 일은 모 부장이 주장하는 농담조로 던졌다는 말(?)을 전해들은 조재화 복지사의 고민을 들어주던 이은주복지사가 퇴직을 만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이다. 지금은 조재화 복지사의 문제는 뒤로하고 이은주 복지사의 재계약불가 방침이 논조이다. 두 문제는 따로 볼 수 없다. 만약 이은주 복지사가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없이 재고용이 가능했을까?
 물론 복지관에서는 그 것과 별개로 예산부족이 원인이라고 응답했다. 그렇다면 이은주 복지사가 성공적으로 이끌고 가는 대장동 사업에 시에서 예산을 책정해주면 계약연장을 해줄 것인가? 그래야 복지관의 주장대로 이번 일은 보복성 부당해고가 아니게 된다.

 조재화 복지사의 페이스북을 보면 자신의 일에 앞장섰다가 계약해지 된 이은주 복지사에 대한 미안함이 구구절절 적혀있다. 조재화 복지사는 두 달가량을 설사를 계속하며 유산의 부담감이 있었을 텐데도 이은주 복지사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이에 이은주 복지사는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자신의 선택은 동일했을 것이라 답했다. 이 둘을 보며 나라면 어찌했을까? 고민을 했다.

 어찌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 계약직 복지사의 고용 계약해지로 결말이 났다. 이은주 복지사가 아무리 복지사로서의 기대가 컸고 보람으로 일했다 해도 복지관에서 가장 힘없는 계약직 직원의 밥줄이 끊긴 것이다. 그런 결과에 시민단체와 크고 작은 단체가 있는 부천에서 생긴 일이다. 부천은 야당의 힘이 더 세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 단체들의 힘이 있는 도시이다. 그럼에도 결과가 이렇다면 나 같은 사람은 제 밥 그릇 지키려 옆 사람의 일에 눈 감고 귀 막아야할까? 아님 팔 걷어 부치고 내 일처럼 달려 들어야하나? 지금의 이은주 복지사는 누구에게 손 내밀어 도와달라 요청해야할까?

조직과 임신

 조직에서 가임한 여성이 생기면 다른 사람의 일이 늘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은 짜증이 날 수도 있고, 가임여성이 일을 그만두었으면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아무리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대하려해도 당장 내 몸이 힘든데 어찌 할 것인가? 그리고 조직이나 회사에 직원이 많다하여도 각자 일의 양이 있으니 어찌 힘들지 않을까? 더구나 한 사람의 감당할 일이 엄청나다는 복지사이니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그러나 아이가 줄어들어 걱정하는 일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요, 온 나라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권장하고 있는데 임신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다는 인식을 갖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이렇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생활이 힘겨운 상황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 낳기를 망설이고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처럼 임신을 하면 가해자가 되는 이 순간 국가와, 자치단체는 이들에게 어떻게 실제적 도움을 줘야할 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한다. 단순히 개인이나, 또는 회사에서, 조직에서 알아서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처사라 생각된다.
 동료직원의 임신사실을 모두가 진심으로 “축하해”라고 활짝 웃으며 안아 줄 수 있는 상황은 결코 개인이 아닌 국가의 몫이다. 왜냐하면 새로 태어날 아이들이 나의 노후를 책임져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너와 나의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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