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부천 사람들의 고향이야기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그리고 곧 추석이 다가오네요. 

부천에는 고향을 떠나와서 정착하신 분들이 참 많은데요. 바쁜 도시생활에서 명절이 아니고서야 갈 기회가 없는 고향, 유년시절의 소중한 기억을 담고 있는 고향, 돌이켜보니 지금의 나를 성장시킨, 힘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고향에 대한 기억. 그 소중한 기억들을 꺼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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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추억으로 제일 인상 깊었던 일은 된장을 만드는 날과 김장김치를 하는 날이었다. 한겨울에 메주를 하는 날에는 삶은 콩을 실에 끼워 밤에 밖에다 걸어 놓고 살짝 얼면 가져 들어와서 먹으며 엄마를 도와 삶은 콩을 비닐에 넣어서 신나게 밟곤 했다. 김장을 하는 날에는 온 식구들이 모여 함께 하면서 북적북적해서 좋았다. 그때만 해도 김장김치는 움에다 넣어 두고 먹었다. 중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호적과 학교 서류에 본적을 경기도라고 적었다. 왜냐하면 친할아버지가 경기도 이천서씨 이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으로 비록 중국에서 태어나서 소수민족으로 생활을 해왔지만 내 뿌리는 한국이라 생각을 해왔다. 이게 바로 70년대 태어난 조선족의 문화와 정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80년대 태어난 조선족은 아마도 저희 때랑은 많이 다를 것이라 생각된다. 
 
▲ 고향에서 고등학생시절
 
서태실(이주여성자조모임 행복열매나눔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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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성묘를 지내고 엄마, 나, 금순 언니. 도로가 메밀밭에서..
 
도시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내 고향엔 다 있었다. 산과 들과 계곡이, 흐르는 강물이 나의 고향이고 놀이터였던 것에 감사하기 시작한 것은 도시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자연 그대로 느끼며 살았다. 그 때를 생각하면 나도 축복받은 아이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내 아이의 고향 부천에는 살아보니 사람은 있더라.
 
문정원(콩나물신문협동조합 사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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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도로가 아스팔트 포장되어 있고 집집마다 자가용, 트럭이 있어 교통이 편해졌는데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만해도 교통이 불편했습니다(동네로 오는 버스는 하루 3회).
추석 때는 면 소재지 농협에서 트럭으로 설탕, 조미료, 물엿 등 다양한 물품을 실어와 팔고... 그럼 동네 아주머니들이 사러 몰려 들구요. 분위기가 점점 추석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ㅎ
명절때는 잘 안 보이던 택시들이 자주 옵니다. 객지에 나가 생활하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오는거지요. 제 큰 누님과 둘째 누님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직하셨습니다. 제가 10살때부터 4년 정도는 명절이 되면 누님들이 기다려졌습니다. (새 옷도 사오시고, 용돈도 주시고... 신기한게 손목시계 선물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없고 나만 있는 ㅎ)
동네 청년회에서는 돼지 몇 마리를 잡아서 큰 덩어리로 싸게 팔구요. 
한 번은 아버지께서 사오셔서 스레트 기와에 온 가족이 구어 먹었습니다. (지금은 석면이 나와 기절하겠지만...^^, 그 당시는 스레트 기와가 기름을 흡수한다고 최고로 쳤습니다)
추석 당일에는 온 가족(사촌까지)이 경운기를 타고 성묘하러 가는겁니다. 지금은 시골에서도 점점 없어지는 경운기가 그 당시에는 최고의 이동 수단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 지금은 생각하면 그때가 참 그립습니다.ㅎ 
시골 고향의 포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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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 달동네가 어릴 적 살 던 곳인데요. 동네에 하나 있는 공동 수도는 물을 틀어 주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어요 물을 받기 위해 집집마다 양철 초롱을 길게 늘어놓고 물을 받아서 물지게로 날랐어요. 가끔 줄지어 놓여진 물초롱에 새치기 하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집 물초롱 옆에서 새치기를 감시 하는게 내 임무였죠.
지금은 그나마 그 동네에 가도 기억을 떠올릴만한 아무 흔적이 없어요. 달동네에 남아있던 산 꼭대기에 군사시설이 생기면서 동네가 모두 철거되었어요.
 
김재성 조합원(상록부동산 공인중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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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이 고향이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느낌도 없네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자라고 있는 부천이
따스함과 사람 살아가는 정을 느끼게 해주는
고향으로 기억될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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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약대동 위브공원 옆의 골목길. 뒤의 공장과 눈 위에 덮힌 연탄재가 아직도 만져질 듯 생생하다.
 
난 지금도 고향이라는 단어에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울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나의 고향은 이러한 그림과는 거리가 먼 부천시 약대동이다. 다가구 주택, 아파트, 빌라 등이 빽빽하게 가득 차있고 주변엔 공장과 상가가 즐비한. 물론 중동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인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동네에는 뛰어 놓을 공터와 널찍한 비포장 골목길이, 주변에는 조그마한 동산과 논밭이 있긴 했었다.
70년대 후반에 지어진 우리 집에는 보통 5~7가구가 함께 살았었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방 한 칸을 얻어 네댓 명의 식구가 함께 살다가 살림살이가 좋아지면 집을 사거나 방을 늘려 다른 곳으로 이사하곤 했었는데, 그렇게 세입자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져 나가는 것을 보며 엄마는 우리 집에 살던 사람들은 다 잘 돼서 나간다며 내심 흐뭇해하시곤 했었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약대동에 자리 잡으신 지 40여 년이 지난 후라 토박이란 말을 듣지만 나 어릴 적엔 우리도 타지 사람인지라 명절엔 큰댁이 있는 수원과 외가가 있는 평택에서 보내 왔다. 명절이 다가올 때 동네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주고받은 인사가 ‘언제 내려가?’ 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걸 보면 우리뿐만 아니라 한 지붕아래 함께 살던 이웃들, 건너건너 옆집 사람들 대부분이 저마다의 고향을 다녀왔었던 것 같다.
사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터라 ‘고향’이라는 말보다 그냥 ‘우리 동네’라는 말이 더 익숙하고 애틋함이나 그리움 같은 건 거의 묻어나오지 않는 고향이지만, 이상하게도 누군가 자신이 자라온 곳 또는 고향이야기를 꺼낼 때면 수다스럽게 ‘약대동’ 이야기를 하게 된다.
지금은 우리 아이들의 고향이 된 약대동, 삼십 여년 후에도 내가 약대동에 살고 있다면 명절에 우리 아이들이 자기들 고향이라며 찾아오려나…^^
 
권미선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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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향 전북 부안은 논 농사를 주로 지어서 생활하는 곳이 많다보니 주변에 온통 농지만 가득하답니다. 산과 강을 벗삼아서 자라온 아내가 결혼 후 처음 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왔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해요. 여길봐도 논. 저길 봐도 논...
고등학교 때 부터 고향을 떠나서 다녔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거의 고향에 갈 일이 없답니다.
2년 전 요맘때에 39개월 아들 녀석을 데리고 고향에 다녀왔었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 있군요.
그때 아들 녀석에게 여기가 아빠가 태어나서 자란 곳 이란다. 저기 할아버지 산소도 있고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아들 녀석하고 한 번 더 고향에 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최원영 조합원(소프트웨어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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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에서 산지가 언 사십여 년이 넘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부천에서 자란 전 많은 추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을 소사동에서 보냈습니다. 그 때 이삭 캐기, 딸기서리, 수박서리, 복숭아서리ㅋㅋㅋ 공소시효 지났죠?
하루는 딸기가 먹고 싶어서 형들이랑 딸기밭에 갔습니다. 넌 젤 작으니까 길에서 가까운 골, 잘 못 달리는 순으로 한 골 한 골 들어가 신나게 딸기를 따먹다 억! 이때 입에 들어간 것은 거름으로 준 동글동글한 똥.덩.어.리... 입에 넣는 순간 악 비명소리와 함께 들리는 ‘누구냐!’라는 불호령~ “도망가!”
추석 즈음 되면 이런저런 어린 날들의 추억이 떠오른 답니다.
“다들 사는 게 바쁘고 사는 곳이 달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올 추석엔 형아들 소주한잔 합시다.”
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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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서울 출신인데
고향하면 떠오는 이미지는 '한옥집 앞마당'입니다.
서울에 살았지만
다행이 한옥에 살아서 앞마당의 정취가
계절마다 따뜻하게 시원하게 춥게
다양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좋습니다.
 
 
 
정문기 조합원(부천 방과후숲학교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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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생활을 하다보니 내 고향이 참 좋은 곳이었구나라는 생각을 뒤늦게 합니다. 내가 서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눈을 돌려 바라보면 산이 제 자리에서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조금 멀리 나가보면 남한강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하고 세련된 것이 마냥 좋아보여서 내가 살던 고향을 그저 답답하게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시절에는 까치발 들고 이 곳 너머를 마냥 기웃거렸네요. 그래도 아직은 고향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는 않지만, 도통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고향'이라는 말이 한해가 지날수록 조금씩 느껴지고 있습니다.
 
김이민경 (콩나물신문 편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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