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간선수로는 천혜의 수영장

 

시우물, 약대, 중동 벌판에

중리양수장으로 한강물 퍼올려...

▲ 시우물(삼정) 농수로 양수시설

시우물 지역에 중리양수장(中里揚水場) 설치

대장마을을 지난 동부간선수로는 오정 누른말앞을 지난다. 현재는 봉오대로 다리 아래에서 물길이 끝이 난다. 그런데 예전에는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부천물류단지를 관통하고 삼정천으로 부르는 붕어내 위로 수로가 연결되었다. 마치 다리처럼 연결되었다. 이제 수로 위로 도로가 뚫려 봉오대로하고 연결되었다.

크고 넓게 정비가 된 붕어내를 건너면 골프연습장이 맞아 준다. 동부간선수로를 메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에 고라개공원이라고 부르는 곳을 통과해서 공영주차장을 지난 뒤 오정로를 관통했다. 고라개공원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오정로 아래로 수로가 흘렀고, 경인고속도로 아래를 지났다. 시우물이다. 이곳부터 갑작스레 급경사가 졌다. 옛 한국화장품 공장이 있던 곳부터 테크노파크 단지가 있는 곳은 지대가 높았다. 그래서 동부간선수로를 건너 한국화장품으로 들어가던 다리 위 쪽에 양수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는 시우물에 위치해 있기에 시우물양수장이지만 건설시기에는 ‘중리양수장(中里揚水場)’으로 불렀다. 이 양수장은 수로를 가로 막아 양수기를 설치하고 그 위를 건물을 지어 관리했다. 약대, 표절리, 장말, 구지말에 물을 댈 때는 쉴 새 없이 양수기를 돌려 물을 퍼올렸다. 겨울에는 물을 빼기 때문에 양수기는 쓰지 않아도 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이 양수장이 존재했지만 부천테크노파크 쌍용 3차 공단이 건설되면서 사라졌다. 한국화장품 공장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그곳에 테크노파크 단지를 건설하면서 사라진 것이다. 한마디로 공단이나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 그곳에 있던 동부간선수로는 용도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도로로 쓰임새를 바꾸었다. 그게 부천시 발전사의 한 부분이다.

▲ 동부간선수로 답사 -부천향토연구회 콩시루

동부간선수로는 천혜의 수영장

지금은 용도가 다 해서 문화시설로 탈바꿈하고 있는 삼정동소각장 옆으로 동부간선수로가 흘렀다. 이어 삼정종합사회복지관, 테크노파트 단지 앞으로 흘렀고, 동부간선수로 건너편은 대규모 벌판이었다. 이름하여 화개앞벌이다. 이 화개앞벌은 지대가 높아 조선시대 때도 수해를 잘 입지 않는 천혜의 벌판이기도 했다. 대신 물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가뭄을 잘 타는 벌판이었다. 그러기에 논 보다는 밭이 많았다.

이 곳부터 부평수리조합의 동부간선수로의 제2구 확장공사 지역이었다. 원래는 부평수리조합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가 김포 신곡양배수장이 안정을 되찾은 1929년 3월부터 1930년 6월 사이에 공사를 진행하여 동부간선수로를 완성했던 것이다.

당시 부천군 계남면의 심곡리, 표절리, 상리, 중리, 구지리를 포함하고, 부평의 마분리까지 포함해서 459정보가 몽리구역이 되었다. 459 정보는 455헥타르, 4.55k㎡, 4,552,066㎡, 1,377,000평 정도 되는 넓이였다. 몽리구역이란 동부간선수로로 혜택을 입는 농지를 가리킨다.

이 일대는 지대가 제법 높아 논 보다는 밭 조성이 쉬웠다. 수로가 완공되기 전에는 밭이 63%, 논이 23%, 임야나 잡종지가 14%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통계로 미루어 보면 밭이 월등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동부간선수로가 건설되면서 주로 밭이었던 곳이 논으로 탈바꿈을 했다.

삼정종합복지관 앞과 삼정동소각장 사이에 동부간선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어 화개앞벌에 있는 논으로 물대기 위해 오갔다. 이 다리 아래에서 시우물 아이들은 뜰채로 고기를 잡곤 했다. 뜰채를 아래로 내렸다가 건져올리면 많은 물고기들이 담겨 있었다.

봄이면 데부둑에 삘기가 가득해서 삘기를 뽑아 먹고 쑥이며 나물을 캐는 아낙네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 시우물은 황토밭이 지천이어서 딸기를 많이 심었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놀다 지치면 딸기를 따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여름이면 동부간선수로에 모여 수영대회를 열었다. 데부둑에서 뛰어내리는 다이빙도 이때 재미있는 놀이였다. 동부간선수로 가득 차오른 물살을 가르며 아이들은 더위를 식혔다.

겨울이면 빠지지 않은 물이 얼어 천혜의 썰매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너나없이 썰매를 끌고 나와 겨울 한 철을 보냈다.

▲ 부천테크노파크 쌍용3차 단지

수도길을 통과한 동부간선수로

동부간선수로는 약대를 지나 수도길을 건넜다. 수도길로 건너가는 다리를 약대사람들은 퉁퉁다리라고 했다. 퉁퉁다리 건너엔 논이었다가 벽돌을 굽는 우신연와(주) 공장이 들어섰다. 이 우신연와(주) 공장은 나중에 중동아파트단지 개발로 공장부지가 수용되면서 대주주들의 배당소득이 늘어나서 1992년도 전국 100위 안에 드는 부자로 대주주 3명이 등극하기도 했다.

동부간선수로가 건설되기 전 1919년 지형도를 보면 이곳에서 수도길은 약대를 지나 중동벌판을 지나갔다. 이 수도길은 굴포천에서 뻗어나온 구지내, 큰내 지류로 인해 범람해서 물 속에 잠길 수 있어 높게 둑을 쌓았다. 또한 굴포천에 서해조수가 밀려들고 집중호우(集中豪雨) 발생하면 언제든지 범람할 수 있기에 둑을 높게 쌓은 것이다. 그 둑 그 아래로 수도관을 묻고 그 위로 수도길을 만들었다. 덕분에 수해로부터 수도길이 잠기는 범람의 위기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

또 이 수도길에서 중동벌판쪽으로 타원형으로 둑을 쌓았다. 서해조수로부터 중동벌판을 지켜내기 위해 약대와 장말, 넘말 지역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 둑은 수도길이 만들어지기 전에 쌓여진 것으로 보인다. 둑이 수도길 양켠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이다. 1910년 수도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수도길 위쪽으로 가즈런이 쌓았을 것인데...그렇지가 않고 수도길 위쪽, 아래쪽을 번갈아가며 쌓여 있다.

소새에서 발원한 큰내, 홍천의 물줄기와 부평 항동리에서 발원한 구지내 물줄기가 만난 그 지점을 중심으로 둑이 쌓여진 것이다. 현재의 부천시청역에서 상동역까지 이 지역 일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길을 중심으로 빙둘러 쌓은 곳에는 논이 만들어져 있고, 다른 지역은 황무지였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 시우물(삼정동)을 통과한 동부간선수로

장말 고분댕이로 앞으로 휘돌아가

해발 19.9m로 꽤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던 장말 마을에는 당시에 계남면 면사무소가 위치해 있었다. 장말은 한자로 중리(中里)라고 했다.

동부간선수로가 생기기 전인 1919년 3월 24일 3.1 운동의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다. 계남면에 살던 여러 면민(面民)들이 참여한 가운데 부천군 계남면 중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집기를 부수고 서류를 소각하였다. 이같은 만세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났던 강한 항거의 표현이었다.

장말에서 너머 마을인 넘말 아래에 고분댕이라는 독특한 땅이름을 가진 곳이 있다. 고분댕이는 1172번지 보람마을 아주아파트 도로 부근이다. 이 고분댕이 앞으로 동부간선수로는 연결되었다. 고분댕이 앞 벌판을 가리켜 ‘고분댕이들’이라고 했다. 동부간선수로가 연결된 뒤에 붙여진 들판 이름이다.

고분은 그 어원이 곱은이라는 말이다. 곱은 곱사등이에서 보이듯이 혹처럼 툭 솟아오른 곳을 말한다. 곧지 않고 휘어져 있는 부분을 가리키기도 한다. 댕이는 ‘대이’로 장소를 뜻한다. 대의 어원은 닫이다. 닫이 닷으로 바뀌고, 닷이 댓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댓이 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고분댕이는 혹처럼 산이 튀어나온 곳을 말한다. 이곳은 논이 아니었다. 넘말에서 갈막부리를 지나 중동들을 갈 때 마주치는 산등성이였다.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이 고분댕이 부분에 침엽수인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중동신도시가 건설되기 전 항공사진을 보면 이 고분댕이 부분에 나무들이 심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분댕이를 넘어 사래이인 상리(上里)인 앞 벌판을 가로질렀다. 장말과 넘말, 사래이 이 지역에는 수많은 논들이 각자 자신의 고유 이름을 갖고 있었다.

서해조수가 밀려올 때 집중호우(集中豪雨)라도 만난다면 구지내, 큰내를 통해 온통 짠물이 헤집어 놓아 농사라고는 반타작을 하거나 2-3년에 한 번씩 수확의 기쁨을 가져야만 했다. 그 참담함 속에서 논들마다 둑을 만들고 만들어서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들은 고스란히 남아 전해지고 있다.

장포들, 대리미재, 밤곶이논, 소나무백이논, 뱀논골, 방아다리논, 물문개논, 개새이논, 개넌너논, 쇠발이논, 새벽구덩이논, 배락논, 동네방죽논, 밭뜬논, 세귀밭논, 백제논, 장승백이논, 봉추논, 덕배미, 수렁배미, 바퀴논, 쪼갈논, 갈논, 수잿물논, 운둥군논, 동정머리논, 돌다리논, 두멍배미, 앞자리논, 쪽다리논, 앞방죽논, 방승백이밭, 수수군논, 군논, 장승백이논, 장구논, 큰도리논, 외송나무벌, 된벌, 거멀논, 제비군논, 쇠발이논, 풀치군논, 특일호논, 김묵벌 등이 있었다.

참으로 많은 논이름 앞에 선조들의 노고(勞苦)를 다시 새겨보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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