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은 희망의 증거다

 

 ‘비판은 희망의 증거다’ 정말 그럴까? 비판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불현듯 북한의 “생활총화”시간이 떠오른다. 매주 마다 호상비판을 하라며 열을 올리는 정치부 소속 인간들... 호상비판을 하지 않으면 되려 문제가 있는 인간으로 낙인을 당하여 억지로 서로 얼굴을 붉히며 비판 하여야만 했던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그리며, “생활총화”시간을 모르고 지내는 대한민국 국민이 된 행복감에 눈시울이 젖어든다.

  다시 인문학 언어로 돌아가 보자. 비판이 가지는 현실적 대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비판에 대하여 좋지 않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까. 상식들의 늪에서 침묵할 수도 섣불리 개입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비판과 토론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비판에 대한 전형적인 잘못된 인식과 편견이 있다.

  첫째로서는 비판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징표라는 것이다. 비판의 대립어는 순응과 수용이다. 따라서 비판은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원인을 찾아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 실천이 비판의 기본적인 정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판은 매우 희망적인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비판의 동의어는 부정이 아니라 희망인 것이다.

 비판을 가로막는 두 번째 생각은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종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비판은 위험하다. 그러면 비판에서 윤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비판은 상대를 깍아 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하는 것이니 존중과 배려가 그 안에 배여 있다. 그러니 상대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윤리는 당연히 비판적 행위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는 것이다.

 비판을 가로막는 세 번째 생각은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전한다고 다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다. 이 말은 비판에도 적용된다. 비판한다고 대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판이 없는 대안이란 생각 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다.

 왜 북한이 오늘 현실을 부인하며, 대중의 눈을 멀게 하고, 세계를 외면하며, “호상비판”강화를 통하여, 서로가 서로를 알게 만들려하는 악착한 방법에 매여 달릴 수 밖에 없는, 슬픈 신화적인 정치 방법을 도용하는지를.... 실천하고, 도전하며, 희망의 용어인 비판에 서로와 서로를 알고 감시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게 만든 악착한 집권 정치자들에게 가증스런 멸시와 조소를 보낸다.

 오늘날 대한민국 현실을 돌이켜 생각해 보자. 선의적인 비판이 우리를 지배하였는가. 슬픈 정치의 역사가 우리를 괴롭힌다. 북에 살건, 남에 살건 비판이 가지는 선의적이며 희망적인 용어 대신에 비굴과 아첨과 그릇된 생각들이 비판을 가로막고, 현실을 눈감아 버리게 하였으며, 보다 낳은 우리들 미래를 의심케 하는 비극적인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참담하다고만 생각한다면 도전이란 단어는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대한국민은 담차고 슬기론 민족역사를 자랑하는 우수민족이다. 정당한 국기와 촛불로 세계를 비추며, 국민이 바라는 세상을 향해 과감하게, 당당히 전진하며, 도도한 정치의 흐름을 부셔놓았다. 이처럼 비판은 기존의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상상하게 하는 통로이다. 비판은 단순히 앎을 위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바로 현실에 대한 개입이자 실천이고, 대안이다.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동아리를 만들고, 현실을 알기위한 공동 비판을 하고, 무엇을 비판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는 상식을 비판하고,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정책과 제도를 문제 삼아 그 이면에 있는 권력관계와 이념을 밝혀내는 비판을 하여야 할 것이다.

 

글 | 원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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