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탄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 네 번째 이야기

 푸나카에서 파로로

부탄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 네 번째 이야기

 

▲ 산사태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차량행렬

 포브지카에서는 모든 통신이 두절됐다. 호텔에서도 와이파이가 열리지 않고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완벽하게 산 속에서 이틀을 보낸 셈이다. 덕분에 함께 온 사람들과 많이 친해졌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사이고 주최 측에서는 가이드북에 명단을 넣지도 않았고 그 흔한 이름표도 준비해 주지 않았다. 함께 한 20명 중 8명은 산을 다니고 마라톤을 하는 모임 멤버들이었다. 전, 현직 대학교수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분들과는 그룹 내에서 별도 그룹처럼 되어 버렸다. 나머지 12명은 교사, 마을운동가, 여행작가 등으로 다양했다. 나는 40세의 젊은 행정학과 교수님과 같이 방을 배정받았다. 지방자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부탄에서 두 밤을 같이 지냈지만 아직은 서먹한 일행들이 통신이 끊어진 포브지카에서 아주 벽을 허물게 됐다. 부탄산 드럭 맥주를 놓고 소박한 파티를 열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날짜를 잘못 알아 하루 일찍 공항에 나온 분은 ‘어제 오신 분’으로 불렸다. 방콕공항 검색대에서 지문을 엉뚱하게 댄 이야기는 모두의 배꼽을 잡게 했다. 모두들 유쾌해졌다. 포브지카에서 돌아오는 버스는 그야말로 웃음 보따리였다.

 

▲ 부탄여행의 일행들

 여행의 오미(五味)는 보는 재미, 먹는 재미, 쇼핑, 현지인과의 만남, 여행자 간의 교류라는 말을 떠올렸다. 짧은 영어 때문에 현지인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부탄사람들은 대체로 영어를 잘한다. 학교수업은 아예 영어로 하고 표준어로 지정된 종카어는 국어시간에 따로 배운단다(종카어는 티벳어와 문자가 같다). 1947년 인도와 함께 영국의 지배를 벗어났는데, 이후 인도사람들이 교사를 하면서 영어로 수업을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계화가 준비된 셈이기는 하지만 자국의 언어를 국어시간에만 배우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문맹률은 40% 정도라고 한다.

 

 포브지카까지 오가는 길은 교량도 터널도 없이 꼬불꼬불 굽잇길인데 이름은 ‘고속도로’다. 산사태가 진행되고 있어서 한참을 기다린 구간도 있었다. 이 계절이 몬순 기간이라 비가 많다고 한다.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한참을 기다렸다가 가야 했다. 산사태로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이룬 곳도 부지기수다. 포장공사를 하는 곳도 있고 산사태를 정리하는 공사장도 있다. 공사장 인부는 대부분 인도 사람들이다. 이 나라도 실업률이 높다는데 인도 사람들이라니. 인도의 자본이 건설을 주도하고 있고, 저임금의 인도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부탄의 취업인구는 33만 명이며 그 중 56%가 농업종사자라고 한다. 농업종사자 중에는 사실상 직장이 없어서 농업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미취업인구 중 승려가 15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나라에서 최고로 선호하는 직업은 공무원. 2만 7천 명 정도의 공무원에 군인과 공기업, 공공기관 종사자를 합치면 6만 7천 명 가량 된다. 주력산업은 히말라야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하는 수력발전이다. 덕분에 국민들에게 싼 값으로 전기를 제공할 수 있다. 수력발전은 GDP의 14%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부문 취업자의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생산한 전력의 75%는 인도에 수출한다. 인도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박진도 이사장의 책).

 

 부탄에 대해 불편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10만 명에 달한다는 네팔난민 이야기다. 인도의 시킴지방(중국과 국경분쟁이 있는 지역)을 사이에 둔 네팔인들은 과거부터 부탄의 남부에 많이 살아왔다. 1975년 네팔인들이 많이 사는 시킴왕국이 인도에 합병되는 것을 본 부탄정부는 위기감을 느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극단적인 동화정책을 펼치면서 네팔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부탄전통복장을 강요했다. 네팔출신들은 이에 저항하여 국제사회에 탄원했고 1990년 초에는 무력충돌로 인명피해까지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10만 명 이상의 네팔계 부탄인들이 추방된 것이다. 유엔난민기구 등이 네팔에 있는 난민촌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제3국 정착을 돕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수가 남아 있다. 네팔난민 문제는 부탄의 아픈 속살인 것 같았다.

 

▲ 푸나카종

 파로로 넘어가기 전에 푸나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유명한 푸나카종을 보기 위해서다. 종(Dzong)은 사원과 행정기관을 겸하는 곳이다. 이곳 푸나카종은 왕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이며 왕의 여름별장으로도 유명하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축물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영광을 실컷 누렸다. 푸나카 시내에서 가방에 매달려 뎅그렁 소리를 내던 워낭은 내 방 책상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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