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남면 면사무소 습격한

 

장말, 계남면 면사무소 습격한

1919년 만세운동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 황어장터 만세운동

● 전국에 걸쳐 진행된 1919년 만세 운동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여 국권을 강탈했다.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야금야금 조선을 먹어오던 결과였다. 조선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실질적인 식민지 통치를 시작했다.

그 첫 번째로 일제히 전국에 걸쳐 토지조사를 하면서 민족의 뿌리를 통째 뽑으려 들었다. 일제 토지조사에 조선인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했다. 반강제적이기도 하고 반자발적이기도 했다. 일제에 의해 작성된 조선지지자료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전국에 걸쳐 당시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지던 땅이름들을 순우리말로 정리해 적어 놓은 것이다. 이를 일본인들이 하지 않은 것은 자명하다.

이렇게 토지조사를 진행하면서 이를 근거로 일본인들을 대거 유입시키고 우리 민족에 대한 일상적인 폭력과 핍박이 이어졌다. 그 악랄함이 하늘을 찔렀다. 애초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전부 학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영구적인 식민지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했기에 그 탄압의 강도가 더욱 더 세질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 걸쳐 벌떼처럼 일어난 독립운동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이러한 일제의 진압에 대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지구상에서 가장 무능했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민족적인 저항 의지는 민족 해방을 위한 거국적인 움직임으로 발전하였다. 1910년대에 만주를 중심으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등 비밀결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이러한 비밀결사 운동과 생존권 수호 투쟁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식민지 약소국가의 민족해방운동의 불씨를 당겼다. 실제는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단 한 가지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당시 저항 운동은 이를 바탕으로 거센 저항의 물결을 만들어 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인 손병희, 최린, 이승훈, 한용운 등 각계 인사 33인이 모여 독립 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 민족지도자들은 1919년 만세운동이후 만해 한용운, 양한묵, 이필주, 김창준, 손병희, 임예환, 최성모, 박준승, 신석구, 박동완 등을 제외하곤 변절하여 철저한 친일분자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그 기개가 아주 높았다.

나중에 일제의 치밀한 회유책에 넘어가 적극적인 친일파가 되었다. 이들 친일파에 대한 처결이 2018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단 한 번의 친일파 단죄가 무산된 뒤 친일파들이 오히려 각계각층에서 지도층으로 실질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국에 걸쳐 친일파들이 일제강점기 시기 못지않게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당시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에 서울을 비롯한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 선언식이 이루어졌다. 이를 기점으로 전국적인 항일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처절한 비폭력 만세운동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고,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탈환하여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 부천군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심혁성 지사(관련 자료)

◆ 부천지역 만세 운동

서울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당시 부천군에서도 거세게 일어났다. 부천군은 일제가 새롭게 작명한 것이었다. 부평도호부에서 부를 따고, 인천도호부에서 천을 따서 거대한 부천군(富川郡)이 탄생한 것이다. 이 부천군은 현재의 부천시로 이어져오고 있다. 당시 15개면에 달하는 아주 큰 군이었다.

부천군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23일에 부천군 문학면 관교리에서 이보경, 이무경, 최선택, 이창범, 이재경, 이상태, 최개성의 주동으로 첫 횃불만세 운동을 피워 올렸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민중들이 스스로 항거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문학면 관교리는 부천군 군청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에서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이 항거 운동을 벌이기 위해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격문 80매를 제작하고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혈성단 단원들은 남북리, 거잠리, 을왕리, 덕교리 주민들에게 격문을 배포했다. 이 격문을 읽고 분격한 150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에서 윤치방, 김윤배, 윤보신, 유웅렬, 구길서, 오기섭 등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일제의 악랄한 고문이 이때부터 조선인들에게 집중되었다.

이밖에도 계양면에선 100여명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 300여 명의 농민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면사무소를 습격해서 파괴했다. 장기리에선 600여명이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했다. 오류리에선 심혁성 주도로 300여명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어 15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동양리에선 10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대부면 동리에선 주민 김윤규, 노병상, 홍원표, 권도일 등이 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덕적면 진리에서도 사립 명덕학교 교사 임용우는 학교운동회를 기회로 서당교사 이재관, 합일사숙 교사 차경창 등과 함께 동리 주민들,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했다. 영흥면에선 10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부천군 곳곳에서 일제에 대한 항거가 계속되었다. 더불어 일제의 탄압 또한 거세게 진행되었다.

● 일제강점기 계남면 면사무소 습격 사건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

1919년 3월 24일이었다. 부천군 계남면의 주민들이 일제의 수탈 정책에 항거하기 일어났다. 계남면 민중들은 장말에 있던 계남면 사무소 앞에 모였다. 거대한 3.1운동에 합류하게 것이다. 계남면에 속한 농민들이 너도 나도 참여했다. 일제 지주, 친일 부재지주, 계남면 사무소에서 자행된 수많은 억압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이렇게 모인 수많은 민중들은 큰 소리를 질러가며 계남면사무소로 쳐들어갔다. 이미 계남면에 민중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계남면 사무소 면장을 비롯해서 면서기 등 직원들은 일찌감치 피난을 한 상태였다. 전국에 걸쳐 일어난 만세운동의 두려움이 이들에게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만세운동 후에 아무일 없다는 듯이 다시 근무를 했다.

계남면 사무소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민중들은 면사무소 직원들이 피와 고름을 짜던 문서들을 마구잡이로 쓸어 모았다.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을 샅샅이 통제하기 위해 우리나라 국민의 이름을 한자로 바꾸어 기록해 놓은 호적대장인 민적부(民籍簿), 조선인거주등록부, 조선인 수탈 장부인 과세호수대장, 면세호수대장이 있다.

계남면 사람들에게 저축을 강요해서 그 자본을 긁어모은 장부인 근검저축조합저금대장, 근검저축 조합은 일제 강점기에 부천군 계남면 지역에서 자립을 위해 청년 단체를 중심으로 저축 장려 활동을 전개한 단체이다. 당시 청년들을 옭아매는 사슬 같은 조직이었다.

이날 불태워진 장부 중에서 대정7년도 주세수시수입수납부, 동원부철, 동영수증철, 문서건명부, 관보, 주보, 대정7년도 연초판매 수시수입수납부, 동원부철, 동납액통지서, 동영수증철, 삼림보호조합 세일부, 묘지사용료원부철, 관보통보수수철, 삼림보호조합세입부원철, 축산조합시장세금수수서류, 동시장용서류, 역둔토신고철, 국유지소작인명기장, 서상 5개, 탁자 3개, 의자 6개, 시계 2개, 산반 2매, 의구 2매, 문진 1개, 면사무연구실상패 1개, 서류용철망 1개, 연상 3개, 연석 3개, 수입 1개, 다분 1개, 다종 5개, 상실생묘 약 1천분, 종감저 20관, 종마령서 약 3관, 소모품, 등료 70전, 계시장 2개소, 용유면사무소 호적부 등을 불태웠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계남면민들을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으로 옭아매던 장부들이었다. 여러 가지 조세제도를 통해서 겨우 입에 풀칠 정도 하는 상태로 만들어 놓았던 장부들이기도 했다.

계남면 면사무소 건물도 초자창(硝子窓), 판벽(板壁) 등이 파괴가 되었다. 면사무소 건물은 부분 파괴를 했지만 불을 지르지는 않았다. 이들 자료들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출간한 한국독립운동사에 생생하게 실려 있다. 다행이 이들 자료가 남아 장말에 있던 계남면 면사무소 습격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알 수 있다.

계남면 민중들은 면사무소 습격 후 이같은 서류며 집기들을 불태운 뒤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친 뒤 해산했다.

● 친일파 계남면 면서기 이경응 집 파괴

계남면 면사무소 직원들은 뻔뻔스럽게 다음 날부터 부내면 사무소에 출근해서 집무를 보았다. 계남면에서 부내면으로 피난을 갔을 뿐이었다. 이렇게 3월 26일까지 부내면에서 업무를 보았다. 계남면 민중들 시위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원들이 면사무소 인근 집을 빌려서 집무를 하게 되었다. 일제는 이렇게 당시 조선인들을 감시하고 다시리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최전방에 있는 면사무소 일을 한시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계남면 사무소 습격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경찰들이 들락거리게 되었다. 이에 대한 민중들은 계남면 면서기인 이경응(李敬應)이 경찰에 밀고를 하였다고 믿게 되었다.

경찰이 물러간 틈을 타 민중들이 이경응 집에 몰려들었다. 이경응 집에 있던 가구들이며 집기들, 여러 가지 살림살이들을 모두 파괴하였다. 집은 네 기둥과 벽이나 창문들은 모두 파괴가 되었다. 한 번 성난 민중들의 분노가 이렇게 표출된 것이었다. 일찌감치 친일파로 민중 수탈에 앞장 서 온 면서기에 대한 응징이기도 했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면서기도 당연히 친일파일 수밖에 없다. 일제의 지시에 의해 수많은 수탈정책을 실제 집행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렇게 며칠에 걸쳐 이루어진 만세 시위로 입은 피해액은 당시 돈으로 300원 가량이었다. 1919년 단성사 극장의 입장료는 특등 1원 50전, 1등 1원, 2등 60전, 3등 40전이었다. 당시 1원의 현재 가치는 5만원 수준이다. 총 1,500만원 정도의 손실이었다. 당시 조선은행권은 일본 은행권과 1:1로 교환이 되었다. 그러니까 조선은행권 300원은 일본은행권 300엔이었다.

당시 물가는 백미 10 kg에 2원 05전, 대졸 첫월급은 50원, 은행원 첫월급은 50원, 순경 첫월급은 45원, 초등학교 교원 첫월급은 40~55원이었다.

이렇듯 부천군 계남면을 포함하여 부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은 민족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당시 조선 민중들의 헌신적인 주도로 이루어진 적극적인 항일 운동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부천군 계남면에서 발생한 만세 운동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장말 지역인 장말 어린이공원 등지에 중리 만세운동 사건에 대한 표지석이나 안내 푯말 정도는 세워야 한다. 그래야 부천에서 나고 자란 후손들이 당시 계남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서서 일제에 항거한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심혁성 주도로 300여명이 시위를 주도했던 옛황어장터에 가보면 만세운동 기념탑, 자료관 등이 있다. 이를 본받아 장말에도 계남면 만세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인 흔적을 남겨야 한다. 장말 후손들, 부천의 후손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증거해서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계남면 면사무소가 있던 장말에서 행해진 도당굿 - 김수남 대동우물.(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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