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골 버스정류장까지 내려가서 막걸리를 사 들고 다시 공초 선생의 묘소로 돌아오니, 뜻밖에도 K형은 키 큰 철쭉나무 그늘에서 모로 누운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밀린 원고 때문에 꼬박 밤을 새웠다고 하더니 그새 몇 잔의 막걸리가 수면제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곤히 잠든 K형을 그대로 놔둔 채 묘소 주변을 서성이다가 문득 공초 선생의 시비(詩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로세로 1m 50㎝, 너비 50㎝ 크기의 화강암 비석 전면에는 그의 시 <방랑의 마음> 일부분이 새겨져 있었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

  ‘흐름’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K형의 설명이 절실했지만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으니 그냥 혼자서 생각해보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서예가 여초 김응현 선생이 한글 예서체로 내려쓴 글씨에 손을 갖다 대자, 문득 1백 년 전 20대의 청년 오상순이 곁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흐름’이란 결국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우주 만물의 운행 법칙.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고, 거역하려야 거역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 제행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러나 그 단순한 진리마저 깨우치지 못한 채 변화의 원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거역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신을 찾는 것인가? 세상에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허무한 게 아니고, 그것이 인생이다. 집착을 버려라. 아니 집착을 버리라는 말마저도 버려라.

▲ 1922년 5월 23일,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어학회’에 참가한 오상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오상순, 세 번째 저우쭤런, 한 사람 건너 바실리 에로센코, 그 옆이 루쉰이다.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어디선가 두런두런하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내려다보니 두 명의 여인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말쑥한 양장 차림에 한 사람은 꽃을 들고, 또 한 사람은 담배 두 갑을 들고 있었다. 나이가 어림잡아 70대 후반쯤으로 여겨지는데 허리가 꼿꼿하고 옷매무새가 단정했다. 인기척을 느끼고 잠시 머뭇거리는 여인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자, 여인들은 상석 위에 꽃과 담배를 올려놓고 절을 올렸다.
  “실례지만 공초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공초 선생이 세상에 한 점 혈육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여인들이 절을 마치자마자 곧 질문을 던졌다.
  “저희는 청동다방 시절 공초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물론 공초 선생님이 저희를 제자로 생각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희는 선생님을 문학적 영감을 주신 위대한 스승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이 타계 57주기인데, 둘 다 미국에 살고 있어서 지금껏 찾아뵙지 못하다가 이제야 선생님 앞에 섰네요. ”
  검은색 벨벳 모자를 쓴 여인이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랜 미국 생활 때문인지 말투가 약간 어눌해 보였다.
  “그럼 공초 선생님을 누구보다 잘 아시겠네요. 저희는 공초 선생님의 생애를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저쪽에 누워 계신 분은 공초 선생님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이죠.”
  K형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청동다방 시절 공초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검은색 벨벳 모자를 쓴 여인보다 키가 조금 큰, 은회색 단발머리에 진한 선글라스를 낀 여인이 대답했다.

▲ 공초 오상순 영결식. 1963년 6월 7일 오전 11시, 국민회당(현 서울특별시 의회 본관)에서 문단장으로 엄수되었다.

 

  “흔히들 공초 선생님을 기인(奇人)으로만 기억하는데,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진 않지만, 그것이 공초 선생님의 모든 것인 양 말하는 건 잘못이에요. 선생님이 기르던 고양이가 죽자 마치 자식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며 정성껏 장례를 치러줬다는 얘기는 선생님의 순수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인데도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술이 먹고 싶어 벌인 이벤트라고 깎아내린답니다. 또 벌건 대낮에 술에 취해서 알몸으로 소를 타고 대로를 활보했다는 둥, 술을 먹다가 화장실 가기가 싫어서 앉은자리에 소변을 보았다는 둥, 그야말로 가십거리의 이야기들만 떠돌고 있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이왕에 선생님에 관한 글을 쓰시려거든 그가 얼마나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인지, 또 얼마나 국제적인 인물인지 지금껏 드러나지 않은 활약상을 부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펄 벅 여사와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언제 일어났는지 K형이 옆에 와서 선글라스를 낀 여인에게 물었다.
  “펄 벅 여사가 1960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청동다방을 방문하여 담배 두 갑을 내놓고, 청동산맥(사인북)에 ‘어둠을 불평하기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라는 글을 남겼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얘기예요. 그보다 공초 선생님이 1917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1918년 북경을 방문하여 <방랑의 북경>이라는 시를 쓴 바가 있고, 이후로도 서너 차례 더 중국을 여행하며 에로센코, 루쉰, 저우쭤런 등 당대의 지성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아요.”
  벨벳 모자를 쓴 여인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언젠가 청동다방에서 공초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얘깁니다. 사실 선생님은 젊은 시절 얘기는 웬만해서는 잘 안 하시는 분이셨어요. 선생님은 일본 유학 시절에 도쿄의 ‘나카무라야(中村屋)’에 지주 드나들었는데, 나카무라야는 인도, 아프리카, 타이완, 러시아, 영국 등 다양한 국적의 지식인들과 일본의 젊은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모여 정치, 종교, 사회, 문화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토론하고 소규모의 작품 발표회도 열었던, 일종의 진보적인 지식인의 문화 살롱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곳에서 러시아 출신의 아니키스트이자 에스페란티스토인 예로센코를 만납니다. 또 바하이교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한 미국인 아그네스 알렉산더와도 교류했답니다.”

▲청동다방이 있던 명동 거리. 1950년대 명동은 예술가들의 성지였다.

   “그렇다면 공초 선생이 젊은 시절 한때, 아나키스트였다는 말씀인가요?”
  K형이 참지 못하고 중간에 끼어들었다.
  “본인 스스로 아나키스트였다고 말씀하신 건 저도 들은 바 없지만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루쉰, 저우쭤런 등과 교류한 것을 보면 젊은 시절에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세계적으로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공초 선생님도 중국, 일본 등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키웠던 것 아닐까요? 공초(空超)라는 호도 이런 열망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공초는 1926년 범어사에 입산수도하면서부터 사용한 호(號)가 아니었던가요?”
  내 질문에 선글라스를 낀 여인이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고들 있지만 사실 ‘공초’라는 호는 1922년 저우쭤런의 일기에 이미 등장해요. 예를 들면, ‘4월 14일, 오후에 조선인 오공초 군이 내방하다. (下午朝鮮吳空超君來訪)’와 같은 기록이 있죠.”
  K형은 뭔가 혼란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 하는 습관대로 계속해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중국 활동에 대해서 저희가 아는 건 여기까지뿐이에요. 더 정밀한 연구는 두 분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여인들이 떠나고 나서도 K형은 계속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새로 사 온 막걸리를 다 마신 후 해거름이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아무튼 앞으로 K형이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 1921년 9월, 알렉산더가 조선에 왔을 때 찍은 기념사진. 사진 중앙이 Miss Alexander이고, 그 왼쪽이 공초 오상순이다. (사진 출처 - 바하이 한국공동체)

 

P.S. : 건국대 박물관에 공초 선생 유품(담뱃대, 라이터, 안경 등) 51점과 청동산맥 46권 등 총 97점의 공초 선생 관련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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