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단순하고 쉽고, 어렵지 않아야 한다.”

이번 13호부터 김재성 조합원이 콩나물신문 편집국장이다. 그동안 권미선 조합원이 해오다, 쉬기로 했다. 김재성 조합원은 편집팀에서 오래 활동해 왔지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신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갑자기 편집국장 어릴 때 꿈이 궁금하다. 뭐가 되고 싶었나?
(으하하하허허허) 중, 고등학교 때는 잘 모르겠다. 어릴 때 아버지가 판, 검사가 되라고 했던 거 같다. 하지만 노는 게 좋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자퇴했다. 형식상 자퇴인데, 실질로는 퇴학이었다. 사고를 친 건 아니고, 가출했다. 그때가 5월이었는데, 집을 나오니 날씨가 아주 좋았다. 무작정 둘이 멀리 갔다, 간 곳은 부산이었는데, 그때는 거기가 제일 먼 곳이었다. 부산에서 한 달을 살았다. 잡지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친구 녀석이 집에 연락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내려오셨다. 그래서 같이 올라왔다.
자퇴하고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달리할 게 없었다. 학원을 두 군데 다니다가, 한 군데서 나오지 말라고 해서 그만두고 그랬다, 엄청나게 삐딱한 학생이었다. 스무 살 때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대학교에 진학한 제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운동권이었다. 그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때는 대학생이 된다는 거 자체가 지배계급일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들었다. 대학 진학을 그만두고, 내 갈 길을 찾자고 해서, 스무 살 때 공인중개사 자격을 땄다. 그리고 감정평가사 공부를 더 했는데 떨어지고 나니, 집에 미안해서, 대학 공부를 다시 했다. 원래는 건대 부동산학과를 가려고 하다가 점수가 안 나와서 인하대 법대를 갔다. 23살, 89학번이었다. 그 뒤로 사회과학연구회란 모임에 가고,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는, 운동판과는 연이 멀어졌다. 지금은 공인중개사를 하며 밥벌이를 한다.
 
콩나물신문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작년에 담쟁이 문화원에서 협동조합 교육을 받는데, 신문사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협동조합 간에 어떤 소식지를 만드는 건 줄 알았다. 나중에 한효석 선생님이 전화를 주셔서 같이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협동조합 소식지가 아니라 지역신문을 만든다는 거였다, 신문을 만드는 주체는 아니더라도 협동조합을 운영하는데, 배울 게 있을 거 같아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때랑 지금이랑 어떤 거 같나? 벌써, 1년이 지났다.
부천에 오래 살았지만, 부천이라는 곳에 관심이 없었다. 시장이 누구다, 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부천에 어떤 사람이 살고, 정치인이 누가 있고, 부천에 세 개 구가 있는데 가본 데가 없다. 오래 살아도 내가 사는 집, 내가 다니는 길 정도만 알았다, 콩나물 신문을 하면서 지역에 더 관심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보고, 공부하다 보니까, 아, 내가 이런 곳에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천에 살고 있다는 의식이 특별히 없었는데, 이제 강해진 거 같다.
 
콩나물신문에 참 꾸준히 온다. 그 이유가 뭔지?
저는 솔직히 사람이 제일 좋다. 만나는 콩나물신문 조합원분들이 되게 좋다. 한효석 선생님도 평생 만났던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을 여기서 다 만났다는데, 나도 100% 공감한다. 좌충우돌하면서 콩나물신문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거, 모두 다 이해관계나 이해타산이 아니라 선의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와 그런 사람들이 좋다. 신문 자체에 대해서 보람은 있는데, 젤 큰 보람은 아니고 두 번째 보람 정도이다. 아직은 언론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이야기하는 게 재밌고, 나오는 결과물에 애정이 생긴다.
 
사람이 좋다고 하는데, 사람이 모이면 갈등이 있다, 콩나물신문협동조합에 갈등은 어떤가?
갈등이 있었다. 이사들이 신문사 운영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서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사람이 다수결에 의해 결정을 하면 거기에 승복하고 따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다수결이라는 게 쉽지 않다. 나는 좀 더 노력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만약에 반대를 하거나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가 나고 의견 대립을 할 수는 있지만, 설득하는 과정이 더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가 어린 사람들이 모인 곳도 아니고 이미 다 성인이니깐 각자 생각을 돌리는 게 쉽진 않았다. 그런 점이 개인적으로 아쉽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아쉽다고, 계속 아쉽다고 할 순 없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많고, 내 곁에 있으니깐, 갈등을 풀어나가며,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
 
조합원이 180명 정도 되는데 2:8, 파레토 법칙이라고 해야 하나, 협동조합인데 다 같이 만드는 건 아닌 거 같다. 협동조합으로 조직을 운영한 지 반년이 넘었는데, 어떤 것 같나?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2:8 정도가 맞는데, 신문을 만드는데 200명 모두가 몽땅 참여할 수는 없는 거 같다. 다 참여하면 오히려 힘들 것 같고. 그걸 풀어내는 게 어렵다. 어떤 모임이든 파레토 법칙이 있는데, 20%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면서 거기서 스스로 만족하는 게 아니고 나머지 80%에 있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고, 20%에 사람들도 계속 순환할 수 있게, 교육하고, 흡수하고 흘러갈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저 사람들은 같이하자고 말해도 안 해” 그러지 말고, 왜 안 되는지 계속 고민하면 좋겠다, 거의 후원개념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늘 참석하라고 하면 어려운 사람도 있고, 각자 조합원의 위치나 의견을 존중해서 최선을 다하게 하면 그게 협동조합에서 참여라고 본다. 나는 파레토 법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한다. 80%의 조합원이 더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은 부족할 뿐이다. 좀 더 쉽고, 단순하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구조가 생기면 좋겠다. 참여 문제는 20%라 생각하는 조합원이 더 고민해야 할 문제지 80% 조합원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콩나물신문은 어떤 신문이라고 생각하는지?
다른 지역 신문을 보면 보도자료나 기사가 항상 우리보다 빠르다. 우리가 더 빠르면 좋겠는데, 아쉽고 그랬다. 저번에 경인일보에서 나온 자선 야구대회 기사는 우리 조합원 이야기인데, 다른 신문에 먼저 실리니 뒷북을 치게 돼서 빠지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생각이 늘었다. 사실 특종이나 어떤 이슈를 깊이 다루는데 욕심이 나지만,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아닌 거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무심히 버리는 이야기들, 버리는 사람들.... 어쩌면 그것을 다루는 게 콩나물신문의 본 모습인 것 같다. 그런데 욕심하고 생각은 제 각자 방향으로 가는 경향이 있어서, 늘 어렵다. 확실한 건, 내 옆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기사가 좋다. 최근에 김지민 조합원이 쓴 버스 기사처럼 취재해서 나오는 기사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기사가 우리가 취하고, 담아야 할 내용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갈수록 종이신문을 안 보고, 조합원이나, 구독자가 늘지 않는데, 팔리는 신문을 만들 수 있는지? 이런 것에 대한 고민이 있나?
답이 없다. 모르겠다. 다만 지금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다 각박한 거 같다. 점점 더 나눠지고 개인 위주로, 우리로 뭉뚱그려지지 않고, 세상이 작은 단위로 쪼개진 거 같다. 그 사람들이 옆에 있는 사람들 아픔이나 슬픔은 잘 공유하지 않으려 한다. 그게 내가 가진 아픔이나 고통을 내보이게 되면, 남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공격의 대상, 어울리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으니 더욱 어렵다. 대신에 재밌는 것들은 공유한다. 빵 터지는 건 옮기고, 전해준다. 그러면서 밝아지는 거다. 문제의식이나 비판의식, 즉 마이너스 의식을 주는 게 신문이기도 한데, 재밌는 내용을 잘 싣다 보면 그것이 사람들을 끄는 힘이 될 거 같다. ‘아이고’ 재밌네, 그런 내용을 담아서 전달하면서 유료화를 요구하면 어떨까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편집국장을 하는데, 공인중개사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나?
그렇게 크게 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움이 된 거 같다. 도움이 된다. 적극적으로 돈 되는 도움은 아니지만, 부동산이란 게 원래 움직이지 않는 걸 부동산이라고 한다. 제가 하는 게 작은 사무실에서 오는 전화나 받고, 밖으로 영업활동을 전혀 안 하는데, 콩나물을 하면서 한, 두 사람 만나고, 그중에 몇 명은 아 저 사람이 부동산을 한데 하면서, 결국 나를 알리는 게 된다. 누가 궁금한 거 물어보면 이야기해주고, 그렇게 일이 시작된다. 실제로 조합원들이 계약도 많이 했다. 최정우 사무국장, 윤혜민, 전현탁, 유병유 조합원에게 집을 소개해주었다.
 
편집국장하면서 앞으로 꿈이 뭔지?
콩나물에 누가 실렸다더라.... 사람들이 그거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고, 콩나물에 실리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게 좋다. 구체적으로 발행 부수나 횟수보다도, 지도층이 아니라 일반시민들에게 이야기될 수 있는, 그런 신문이 되는 날을 꿈꾼다.
 
릴레이로 조합원 인터뷰를 하려는데, 추천하고 싶은 조합원이 있는지?
최근에 최은경씨가 조합원으로 들어왔는데, 오자마자 이사를 맡았고, 그동안 마을 활동도 많이 했고, 적극적인 사람 같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김재성 조합원과는 사흘 동안 만나 인터뷰를 했고, 녹취를 푸니 다섯 시간 분량이었다. 지면에 한계가 있고, 개인사가 많아 모두 담을 수 없었다. 그는 조근조근 자신의 일생을 다 이야기해주었다. 말썽꾸러기 학생에서, 세 아이 아버지가 되었고, 부천에서 산다는 게 뭔지 알아간다는 사람. 사람이 제일 좋다는 그의 말은 참말 같았다.

<사무실 입구, 콩나물신문사 스티커가 중앙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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