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부천 이야기 7

 

▲ 2006년도 범박마을 전경

▲ 2015년 부천범박마을 휴먼시아 2단지를 제외한 범박마을 일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범박마을

 범박마을은 범박 안동네로 불리웠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범박동만 있다. 이 범박동은 부천 괴안동, 계수동, 옥길동에 둘러 싸여 있다. 아주 자그마한 동이다. 1957년도 43만평에 달하는 부지에 천부교 교인들이 모여 만든 신앙촌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그야말로 구석진 동네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 하루 지나 눈떠보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설만큼 상전벽해를 진행해가고 있는 중이다. 범박동 일대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앙촌 아래 뒷골도 이미 아파트가 점령해가고 있다. 그곳 양지마을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이리 뜯기고 저리 뜯겨 볼품이 없어진 숙공산만 간신히 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범박마을은 신앙촌과는 너무도 무관하게 조선 오백년을 넘게 지속해온 마을이었다. 그런데 부천범박휴먼시아 2단지가 건설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을 집들은 모두 부서지고, 그 자리를 높여서 공원으로 만들거나 유치원이 들어서 있다. 범박마을 한가운데를 서해안로가 관통하면서 주변과도 단절되어 버렸다. 서해안로 건너편은 상가들이 조성되어 있다.

 

▲ 2015년 범박마을 죽은느티나무

 

 단지 남아있는 것은 느티나무 몇 그루. 그런데 500년이 넘게 범박마을을 지켜오던 범박느티나무는 공원으로 옮겨 심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다. 배못탱이에 있던 다른 느티나무 한그루도 말라 죽어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느티나무를 죽게 만든 것은 아파트를 건설한 건설사이다. 이들은 그저 옮겨 놓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온갖 정성을 다해 느티나무를 살리려는 노력조차 해보지 않았다. 500년이라는 세월동안 범박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는 부천범박휴먼시아 2단지 전체 아파트를 판 값보다 더 값지다. 왜냐하면 한 번 죽어버린 범박느티나무가 다시 살아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00년의 세월의 가치가 고스란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 건설사는 사과 한마디, 보상 한푼 없이 그저 공원에 죽은 나무만을 덩그렇게 심어놓았을 뿐이다.
 이 범박느티나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까마득한 윗대까지 거슬러 올라 범박마을을 지켜주던 수호신이었다. 마을 선조들은 느티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을 빌고 서로의 행복을 축원하는 한마당 잔치까지 벌이던 곳이었다.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는 범박초등학교 학생들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마을 사람들의 땀을 식혀주던 그늘이 풍성한 곳이었다. 그 범박마을, 범박느티나무가 지도에서도, 사람들의 가슴에서도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못탱이에 느티나무가 한그루 있고, 범박마을 언덕에도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하지만 이들 느티나무도 자칫 관리를 잘못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놓여 있다.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 2006년도 범박마을 느티나무

▲ 2006년도 범박마을 집들

 

범박마을의 의미

 전국에 범박골이 많다. 천안 덕성리, 천안 도림리, 천안 풍서리, 단양 벌천리, 장흥 진목리, 순천 동산리, 진주 중안동, 상주 오대동, 김천 신옥리, 평창 수하리 등이다. 이들은 순우리말로 기록되어 있지, 한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부천의 범박마을만 한자로 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범박동(範朴洞)으로 올라 있다. 부평군 옥산면에 소사리, 괴안리, 벌응절리, 조종리, 표절리는 마을 리(里)를 쓰고, 범박동, 항동만 ‘골 동(洞)’을 쓴다. 골은 고을의 준말이다. 마을이 조금 클 때 쓴다. 소새하고 그 크기가 비슷하다. 집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1789년도에는 50가구 정도가 살았고, 인구는 186명 정도였다.

▲ 2015년 범박마을 주변 집(개발 안된 지역)


 전국의 범박골로 비춰볼 때 범박(範朴)으로 표기한 것은 오류로 보인다. 순우리말을 한자로 옮겨 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자로 쓰다 보니 ‘범씨와 죽산박씨’가 정착하여 범박동이란 명칭이 붙여졌다고 해설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범씨는 ‘금성범씨(錦城范氏)와 안주범씨(安州凡氏)’가 있다. 한자표기로도 다르다. ‘법 범(範)’이 아니라 ‘풀이름 범(范), 무릇 범(凡)’으로 쓰기 때문이다. 박(朴)도 마찬가지다. 순우리말을 ‘성씨 박(朴)’으로 표기한 것이다.
 또 한가지는 범박동에서 제일 큰 산인 할미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치 호랑이 앞발자국 형태와 같아 그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호랑이라고 명칭하려면 ‘범 호(虎)’로 써야 맞다. 할미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범박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지금은 계수리, 계수리하고 붙어 있는 범박동이 산언덕 꼭대기까지 점령해서 집을 짓고 있다. 이들 집들은 신앙촌이 생긴 이후부터 지어진 것이다.

 범의 어원은 ‘’이다. 이게 밝으로 되고, 붉으로 바뀌었다. 그 다음 불로 바뀐 뒤 범으로 바뀐 것이다. 괴안에서 범박으로 들어오는 고개를 ‘불당고개(佛堂峴)’라고 하는데 이 ‘불’이 범의 어원이다. 여기서도 불교의 불당(佛堂)이 있는 고개로 해석하는데 그 뜻이 전혀 다르다. 불당이 있을만한 고개가 아닌 것이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불당골, 불당고개가 한자로 불당(佛堂)으로 쓰는데 부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박(朴)도 똑같은 ‘’으로 범과 똑같이 ‘밝은, 빛나는’의 뜻으로 삼한시대 이전 태양신을 지칭할 때 주로 쓰이던 말이다. 그러므로 범박이 ‘’의 의미로 쓰였다. 이걸로 미루어 범박마을이 ‘태양신을 맞이하는 장소가 마을 동쪽에 위치한 곳’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범박마을에서 바라보면 암우들을 건너 작은 산이 있는데, 바로 함박산(咸朴山)이다. 함(咸)은 ‘크다’는 뜻이고, 박(朴)은 범박의 을 한자로 쓴 것이기도 하다. 함박산 아래 함박마을이 있다. 함박산을 뚫고 아침해가 힘차게 솟아오른다.

 

▲ 2006년도 배못탱이들(암우평(岩隅坪) 모습


 범박마을 앞 들판이 배못탱이이다. 이 배못탱이에서 ‘못탱이’는 ‘모탱이’의 잘못된 표기이다. 모탱이는 모퉁이를 가리킨다. 배는 ‘’에서 온 말이다. 은 한자로 옮길 때 여러 가지 말로 옮겨졌다. 백(白, 百), 박(朴), 팔(八), 발(鉢), 불(不), 불(佛)은 음을 따서 옮겨진 경우이다. 광(光), 명(明), 이(梨), 평(坪), 족(足), 양(陽) 등은 뜻을 취해서 옮긴 것이다. 그래서 배못탱이는 ‘태양신을 맞이하는 모퉁이’라는 뜻으로 읽혀진다.
 범박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인 계수리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어 범박마을이 태양신을 맞이하는 신성한 의식의 한가운데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범박마을 근처에서 청동기 유적이 발견된 바 없지만 서로 관계가 있음은 자명하다.
 결론적으로 불당고개, 범박마을, 배못탱이, 함박산, 함박마을이 모두 ‘’을 공통으로 쓰고 있다.

 

배못탱이 설화

 범박마을에서 암우들로 휘돌아가는 곳을 배못탱이라고 한다. 그 어원은 앞에서 설명을 했다. 이 배못탱이에는 힘겹게 세상을 살아낸 선조의 설화가 남아 있다.
 암우들이 길게 뻗어내려 만나는 곳이 용문내이다. 안양천으로 이어진다. 이 용문내를 통해 한강물이 오르내렸다. 밀물 때면 강화에서 밀고 올라온 바닷물이 밀물과 섞여 안양천 곳곳을 물결로 넘실되게 만들었다. 당연히 안양천 지류인 용문내로 물결이 넘쳐흘렀다. 그러기에 폭우가 심하게 내리는 장마철엔 안양천, 용문내가 범람하기 일쑤였다. 큰 수해를 당하면 용문내 일대가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바다들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범박마을은 지대가 높아 수해민들의 피난지로 자주 애용되던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1925년도에 엄청난 수해가 발생했다. 어쩌면 역사상 가장 큰 수해일지도 모를 대홍수였다. 이해에는 무려 4차례나 대홍수가 일어났다. 이들 대홍수 가운데 구로, 부천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차, 2차 홍수였다. 1차 홍수로 인한 물이 빠지기도 전에 2차 홍수가 연달아 발생함에 따라 한강 중상류 지방에는 500~600㎜의 집중호우가 내렸다.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이 범람하였다. 광명 일대에서부터 구로구·금천구·영등포구 일대, 부천군 일대는 진흙 바다로 변하였다. 부천의 굴포천이 범람해서 삼정, 오정, 약대, 장말 지역도 물바다였음을 두말할 나이도 없다.
 이 대홍수로 인해 구로 항동에 있던 집들이 모두 물에 잠기어 버렸고, 세간살이들은 건져낼 틈조차 없었다. 구로 항동에 살던 마을 주민들이 뗏목을 만들어 타고 죽기살기로 노를 저어 범박마을에 도착했다. 이들 수해민들은 대홍수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손바닥에 피멍이 들 정도로 노를 저었다. 그렇게 얼마를 저었을까? 그리하여 살았다는 환호성과 함께 이들이 타고 온 뗏목을 범박마을 느티나무에 매어놓았다. 이렇게 하여 배못탱이라는 땅이름이 생겼다. 어원적으로는 다른 뜻이 되지만... 

▲ 2015년 범박마을 언덕에 있는 느티나무
▲ 2015년 부천범박마을 휴먼시아 2단지를 제외한 범박마을 일대

글ㆍ사진Ⅰ한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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