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멧마루 봉안산(鳳鞍山)이 길마재(?)
멧마루에 봉안산(鳳鞍山)이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산이 있었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봉안산(鳳鞍山)은 은데미에서 계산을 거쳐 길게 뻗어 내려온 끝 부분에 위치해 있다. 멧마루 북쪽에 길게 뻗어 있던 산이다.

 
 
현재는 해주1,2차아파트, 태백맨션, 동문아파트, 대풍푸른들아파트, 삼풍주택, 욱일6차 아파트, 원종동세창짜임 1차아파트, 럭키파크가 있다.
봉오대로가 봉안산 자락을 잘라 먹고는 그 끝머리에 조그만 솔산을 남겨 놓았다. 봉오대로에서 원종동으로 들어오는 톨게이트가 자리를 잡고 있다. 봉안산을 가로 질러 멧마루 사거리에서 오쇠리를 거쳐 김포 공항으로 가는 길이 뚫려 있다. 소사로이다.

1911년도 발간한 조선지지자료에는 한자로만 봉안산(鳳鞍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한자대로 해석하자면 ‘봉황의 안장을 닮은 산’이라는 말이다. 봉황의 안장이라?

1919년 지형도 봉안산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봉안산은 두 개의 작은 봉우리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봉우리가 날개처럼 길게 뻗어 있다. 이게 봉황의 양날개를 닮았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두 봉우리 사이가 움푹 들어가 있다. 마치 소에 나뭇짐이나 볏짐, 보릿대짐 등을 실을 때 소등에 얹어놓은 길마를 닮았다. 보통은 이를 가리켜 길마라고 한다. 길마를 닮은 산언덕을 가리켜 길마재라고 한다.
그런데 멧마루에는 길마재라는 말이 남아 있지 않다. 멧마루에 살던 토박이 분들이 이 길마재라는 말을 애용할 듯 싶은데 그렇지 않다. 그러기에 길마재는 이 봉안산 해석에서 멀어진다.
서울 인왕산 맞은편에 안산(鞍山)이 있다. 이를 길마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국에 길마재는 수도 없이 많다. 금이야 옥이야 소를 키운 우리네 농촌 문화가 땅이름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봉안산에 대한 어원적 풀이
이 봉안산(鳳鞍山)을 어원적으로 풀이해 본다. 먼저 가운데 ‘안(鞍)’은 ‘구르, 기르, 고르’의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이는 바다나 하천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의 고대 어형이다.
천소영의 고대언어 어휘연구에 의하면 하천을 의미하는 고대어에는 가라(加羅)/가야(加耶)/가락(伽落)/거로(巨老)/거야(巨野)/고록(古祿)/고리(古離)/굴(屈)/갈/걸(乬)/걸(沃)/서(西)/안(安,鞍)/마(馬)/해(海)/아오(我烏)/하(河) 등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동음(冬音)/동석(冬焟)/도을(道乙)/도리(道利)/독로(瀆盧)/진량(珍良)/월량(月良)/파단(波旦)/파리(波利)/남(南)/여(餘)도(徒)/원(猿)/源이 있다고 했다. 우리말 발음으로 다라/더러/도르/도리/도름/두름/두리/덜/돌 등이 있다.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하천, 즉 개울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바다를 의미하는 말에는 바다/바리/바/바/나/나무/나미 등이 있다.
봉안산에서 안(安, 鞍)이 하천, 즉 개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어이지만 그 이후 실제 땅이름에서 너무 많이 애용하고 있다. 하천의 이미지하고 안(安, 鞍)이라는 말이 너무도 달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봉(鳳)은 봉황을 지칭한다. 봉황은 고대에서부터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이다. 기린·거북·용과 함께 네가지 영적인 동물 중의 하나로 여겼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봉안산은 ‘봉황이 사는 하천과 접해있는 산’으로 읽혀진다. 여기서 하천은 베르내이다, 베르내가 멀미인 원미산 칠일약수터에서 발원해서 망골을 지나고 삼막골을 지난 뒤 까치울을 지난 뒤에 멧마루를 곁에서 지나간다.
고리울의 봉배산이 봉황이 사는 산이라면 거기에서 살던 봉이 날아와 봉천이골인 봉천곡(鳳泉谷)에서 물을 마시고, 봉안산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점말의 봉황골도 여기에 가세한다. 봉배산, 봉천이골, 봉안산, 봉황골이 하나의 스토리라인에 들어와 있다. 각각 위치해 있는 곳이 그리 멀지 않아 서로 연결성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봉황이 태양신인 하느님과의 소통을 매개하는 영물로서 이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고 보여진다. 그러기에 이러한 설화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이야기가 자리를 잡는다.
봉배산에선 청동기시대 유물이 대거 발굴되었고, 이후 삼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유물까지 나온 걸 보면 이 일대가 부천의 선조들이 집단주거지로 오랜 세월동안 살아왔음을 증명해준다. 더불어 땅이름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조금 비약하자면 봉안산 바로 앞으로는 서해조수가 밀려들 때면 멧마루 바다처럼 많은 물이 출렁거렸을 것이다. 멧마루 앞 벌판이 농지로 개발되기 이전에는 그저 갈대밭에 갯골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 갯골로 서해조수가 간만의 차를 보일 때마다 밀물과 썰물을 반복했을 것이다.
베르내하고 연결된 거칠개가 작은 포구여서 멧마루 사람들은 이 포구에서 아주 작은 배를 부리며 고기를 잡기도 하였다는 것을 땅이름이 보여준다. 그리고 썰물 때는 멧마루 바다가 넓게 바닥을 드러내 갈대밭과 갯벌이 뒤섞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멧마루 사람들은 갯벌에 나가 게나 조개를 캤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전국에서 봉안산으로는 경기도 안성군에 있는 산인데 이 산을 봉암산이라고도 한다. 전남 담양군 무정면 봉안리에 봉안산(鳳安山)이 있다. 가운데 안(安)은 하천을 의미하는 고대어를 차용한 것으로 그 뜻이 똑같다.

◆ 봉안산은 밀양손씨 선산
봉안산은 멧마루에 살았던 밀양 손씨의 선산이었다.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봉안산에 많은 침엽수인 소나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 표시가 되어 있다.

1976년 편집 지도
1976년도 편집한 지도를 보면 현재 동문아파트 자리는 밀양손씨의 묘지 4기가 있는 걸로 표기되어 있다.
이 자리는 70년대 부천의 대표적인 기업이었던 태양연와(太陽煉瓦)가 매입을 했다. 1988년도 8월에는 동문건설이 매입하여 동문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총 350세대로 1990년 4월에 입주했다.
동문아파트를 짓기 위해 묘소를 해체했을 때 사람의 뼈가 많아 나왔다. 그 묘 중에서 2층으로 지어진 묘도 있었다. 비석이 있던 큰 묘소가 6기(基 )가 있었다. 묘지 맨 아래에 있었던 비석에는 정부인윤씨라고 쓰 여 있었다. 묘지 앞에 놓여진 상석이 매우 컸다. (원종동 서정남, 유대화, 김영회 증언)

● 봉안산 옆에 계산(鷄山)이 있었다.

멧마루 계산의 흔적, 상수리나무 - 성지교회
계산(鷄山)은 은데미하고 봉안산 사이에 위치해 있던 산이다. 지금은 온통 주택이 들어서 있다. 길게 이어진 언덕으로 남아 있어 계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1년도에 출간한 조선지지자료에선 부평군 하오정면 원종리 계산(鷄山)으로 소개하고 있다.
멧마루 동남쪽에 위치해 있던 쇄기마을 뒷산이었다. 1919년 지형도에는 해발 31.8m로 표기되어 있다. 마치 성처럼 쇄기를 거치고 새탄말을 거친 뒤 멧마루까지 뻗어 있었다. 오정초등학교, 성지교회, 먼마루어린이공원, 원종1동주민센터 등에서 원종로를 건넌 다음 부천프라자, 부천제일요양원을 거치고 대덕하이츠빌까지 포괄하는 긴 산이다. 원종로 65번길, 원종로66번길이 산등성이로 보인다.
쇄기 계산(鷄山)과 고리울 간데미 사이에는 고리울내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 도로로 변해버렸다. 고리울내도 굴포천하고 합류를 해서 서해조수가 밀려오는 밀물 때면 고리울내 상류까지 올라가 봉천이골까지 도달하곤 했다.

◆ 계산(鷄山)의 어원풀이
계산은 순우리말인 고대어로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오랜 세월이 지내오면서 순우리말을 즐겨 쓰지 못하고 계산이라는 한자어를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계산은 순 우리말로 닭미로 읽는다. 닭산으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뒤에 오는 ‘미’는 산을 나타낸다. 부천에선 산을 가리켜 주로 미를 썼다. ‘멀미, 할미, 상살미, 소개미, 간데미, 은데미’ 등으로 쓰였다.
이 닭미는 달미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달은 더 나아가 ‘ᄃᆞᆯ로 표기한다. 달이 첫째 음절에 오면 높다는 의미이다. 뒤에 오면 제법 높은 산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달의 뜻을 받아 훈차를 한 것이 ‘돌 석(石), 달 월(月), 다리 교(僑), 들보 양(梁), 들 야(野), 닭 계(鷄), 다락 누(樓)’이다. 우리말로는 ‘달, 돌, 들’로 변모했다.
달이 산의 의미로 쓰여진 땅이름들을 모아 보았다. 다양한 변화가 엿보인다.
다라래, 다라리, 다라실, 다랭이, 다롱이, 다리목, 다리골, 다랫골, 대룻골, 닥골, 닥실, 딱골, 닭굴, 닭내, 닭섬, 닭머리, 닭실, 닭재, 닭밭, 다악굴, 닥개, 때깨, 닥고개, 당고개, 땅고개, 땅재, 닥내, 당내, 닥머리, 당머리, 닥말, 닥물, 당머리, 담뫼, 땀골, 닥밑, 당밑, 댕밑, 닥섬, 딱섬, 닥실, 닫들, 단다리, 단더리, 닫골, 다부냇골, 달골, 다리골, 닥재, 당구재, 달개, 다리개, 달고개, 돌고개, 달내, 달나부리, 달낫재, 달들, 다랫들, 다랫굴, 다락밭, 다락굴, 달락굴, 다랑골, 다랭굴, 다래기, 달롱개, 달마니, 달못, 달목, 달리목, 달뫼, 달메, 달산, 달머리, 달바위 독바위, 달밭, 달앗, 닥밭, 딱밭, 돌밭, 달아래, 다라리, 달아실, 달애골, 다랫골, 달아실, 달실, 다리골, 땅골, 달안, 달한, 달으재, 달재, 달쟁이, 달배미, 달팽이, 돌골, 독굴, 돌실, 덕골, 덕굴, 독샘, 독시암 등이다.

계(鷄)라는 글자는 높다는 의미를 받은 것이다. 이에 멧마루 계산이 다른 산에 비해 높지 않았다. 그러므로 ‘높다’는 의미는 ‘신성한 산’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계산(鷄山)에는 의령남씨의 종산으로 남장군의 말과 갑옷을 묻은 큰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부장품으로 집에서 키우던 소를 매장했던 소무덤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큰 무덤이 두 개나 있었다. 이 큰 무덤에서 동네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면서 놀았다. 미끄럼을 탈 수 있을 정도로 무덤은 컸다. 1975년 무렵에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하였다.
이 말무덤은 신으로까지 여겨지던 족장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말무덤에서 ‘말’은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라 ‘큰, 크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여기 있던 말무덤은 전라도에서 발굴되었던 마한의 고분 같은 그런 묘지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멧마루 지역에 성터골 있고, 성재너머가 있다. 거기에다 성골 마을도 있다. 이같은 땅이름으로 추론해보면 고대국가 시기 정도에 멧마루 마을에 토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토성은 다른 마을로부터 자신들의 마을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축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의령남씨 남장군 집 주위를 흙으로 높이 쌓아 성곽처럼 축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 걸로 미뤄볼 때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조선시대까지 성곽처럼 높이 축성이 되어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구전자료이다. 이를 근거로 그 토성은 삼한 시대, 고대로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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