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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스
콩나물신문
197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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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신곡리에서 구지말까지 이어진 부천에 동부간선수로, 데부둑이 있었던가?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 동부간선수로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동부간선수로가 있다. 데부둑, 동부천, 부둑천이라고도 부른다. 부천벌판에 물을 적셔주고 농사를 짓게 해주었던 젖줄이었다. 동부간선수로가 없었다면 부천들판은 갈대가 무성한 조선시대 그것이었다. 이 수로가 있으므로 해서 광대한 부천평야가 만들어진 것이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해방 이후 부천뿐만 아니라 서울, 수도권에 쌀공급을 담당해오던 최대
내고향 부천이야기
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9.0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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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일본인 반전농장을 탄생시킨 부평수리조합1925년 일차 완공, 을축년 수해로 1929년 이차 완공 부평수리조합의 탄생우리는 흔히 부천평야, 중동벌, 대장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중동벌은 이미 아파트 단지로 메워져 버렸고, 겨우 남아 있는 것은 대장벌뿐이다. 아파트 단지로 변하기 전의 중동 지역은 하늘의 비에 의존하는 논들이었다. 굴포천 일대에는 서해조수와 결합된 수해(水害)에 시달려 농사를 온전하게 지을 수가 없었다. 당시 부천평야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일제는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 그 평가에 의해 부평수리조합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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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8.2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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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동산, 수도길, 김포선, 데부둑이 있던 약대 답사 약대 일대를 답사하기 위해서 비 오는 토요일 콩시루 회원들이 모였다. 콩나물신문사 사무실에서 모닝커피 한잔으로 속을 달랜 뒤에 길을 나섰다. 바람도 불고 비는 주룩주룩 부천이 도시화되기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 약대 오거리에서 바라보니 태양공구상가엔 분둣재가 봉긋 솟아 있었고 내동 공단엔 붕어마루산 그리고 약대오거리를 지나는 길엔 붕어내가 졸졸졸 개울물 소리를 흘려보냈다.깊은구지에서 시우물을 거쳐 한다리께로 가던 마차길 아스팔트에 덮여 마찻길인지 찻길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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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신문 조합원
2016.08.02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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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벌판에 서해조수가 밀려들었다한강은 하루에 두 번 역류(逆流) 한강은 하루에 두 번 역류해서해에는 아침 저녁으로 밀물과 썰물이 교차한다. 거세게 밀물이 밀려들었다가 다시 썰물로 쑥 빠지는 현상이 바로 서해조수이다. 그러기에 제부도는 하루 두 번 바닷길을 열어준다. 이 서해조수가 없다면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서해조수로 인해 간만의 차가 생겨난다. 즉, 간조와 만조 사이에 큰 차이가 생겨난다는 뜻이다. 그 차이는 인천앞바다에서 최고 10m에 달한다. 보통은 5-6m 정도이다. 그 이하로는 내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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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7.27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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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梧亭)이라는 이름의 마을, 지금은 있을까? 오정(梧亭)이라는 이름의 마을부천에서 오정(梧亭)이라는 땅이름만큼 논란이 된 것도 없다. 여러 표기들이 난무했다. 오정은 한자로 땅이름부터 순우리말까지 다양하게 쓰였다. 순우리말로는 ‘머귀정이, 머구쟁이, 오쟁이’이다. 한자로는 ‘오정(梧亭), 오정(梧丁), 오정(悟亭), 오정(梧井), 오정(吾丁), 오정(五丁)’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한동안 오정(吾丁)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오정(梧亭)으로 통일되었다. 그런데 이 오정마을이 오정동으로만 남아 있고, 진짜 마을 이름은 오정생활휴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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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7.12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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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마을’인 약대(若大), 그 역사를 찾아서... 약대(若大)의 의미 약대는 한자로 약대(若大)라고 한다. 조선시대 정조 17년에 발간한 호구총수에는 부평부 상오정면에 약대리(若大里)로 되어 있다. 1911년도에 발간한 조선지지자료에도 약대(若大)로 표기해놓고 있다. 한자로 읽으면 ‘같을 약(若), 큰 대(大)’로 읽는다. ‘큰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약대는 안약대와 밧약대로 나눈다. 내리인 내촌(內村)과 도당(陶唐) 마을을 안약대(若大)라고 한다. 두 개의 마을을 포괄하고 있다. 반면에 시우물인 삼정(三井)마을과 약대(若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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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6.30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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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 마을의 ‘해골동산’ 그 의미도 새롭다 ‘소개미들’은 어디에 있었나?한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작은 나룻배로 굴포천을 건너야 했기에 소개(小浦)가 있었다. 뒤에 붙은 ‘미’는 산이라는 뜻이다. ‘미, 뫼, 메’가 산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미가 물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부천에선 멀미, 상살미, 시르미 등을 종합해 볼 때 산을 지칭하는 것이 맞다. 이 소개미는 붕어마루산과 같은 산으로 도당공단, 내리공단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보면 수량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약대나 내리, 시우물 사람들은 소개미가 위쪽에 있고, 붕어마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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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6.09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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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청소년수련관이 자리해있는 멀미의 초입 칠일약수터가 베르내의 원류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학생들과 생태수업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손만 담그며, 약수터의 물이 적합판정을 받아 먹을 수 있는 물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예전엔 밭이었던 청소년수련관, 밭과 밭 사이의 경계를 알리는 탱자나무, 밤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고 식당이 있어서 밤골, 활터가 있었다는 옛 모습을 상상하며 그림으로 그려졌다. 수련관 아래쪽엔 체육관이 들어선다더니 곧 지어질 모양이다. 지금은 텃밭으로 남아 있는데 체육관이 들어선다면 망골은 완전히 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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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부천향토연구회 콩시루 회원)
2016.05.2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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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청소년 수련관에서 집합하여 수련관 뒤쪽 100미터쯤 올라가면 칠일 약수터가 있었다. 약수터에서 한도훈 강사님께서 구수한 목소리로 베르내 발원지를 설명해 주시고 부천의 녹지율이 13.9%밖에 되지 않지만 예전엔 이곳이 청정지역 이였음을 알려주셨다. 자주 들린 수련관이지만 오늘 따라 새로운 설명을 들어서일까? 옛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예전엔 연못 위 야생화 단지 쪽에 음식점이 하나 있었는데 강사님은 그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어 본 기억이 있다고 하셨다. 그때 심은 벽오동나무와 은행나무가 지금 우리가 연못 위에서 볼 수 있는 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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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순(부천향토연구회 콩시루 회원)
2016.05.2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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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배산” 요즘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이름이다. 부천에서 30여년을 가까이 살았지만 그동안 그 이름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이름이기에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기억하기 쉽지 않았는데, 드디어 오늘 봉배산에 올랐다. 산이라고 하기에 무색할 만큼 마을 뒷산 같은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 속에 그동안 내가 모르던 부천의 비밀이 숨바꼭질하듯 곳곳에 숨어 있었고, 술래가 어디 있는지 의식도 못하고 지나는 많은 사람들 속에 밟히고 잘려 상처투성이로 또 한 시대를 고스란히 보내고 있었다. 봉배산은 청동기 시대를 살아왔고, 고려시대와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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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희(부천향토연구회 콩시루 회원)
2016.05.0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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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에 소개미가 있고, 붕어마루산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붕어 없는 붕어내가 흐르고... ◆ 부천에 붕어내가 있다. 부천에 붕어내가 있다. 보통 삼정천(三井川)으로 부른다. 붕어내가 맞을까? 삼정천이 맞을까? 지금은 삼정1,2천으로 나누어 부른다. 그러니까 두 개의 내(川)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얘기다. 붕어내에는 먼저 ‘소개미내(소개미천), 원골내(원골천), 내내(내천,內川)’가 합해져서 흐른다. 매봉재 북쪽에 위치한 중주군골에서 흐르는 개롱지내가 압구지에서 합류했다. 4개의 작은 개울이 합쳐져 붕어내로 흐르다가 한다리 근방에서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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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5.03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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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로 개량 복숭아 재배 시작‘복사꽃이 만발한 고을’인 복사골, 부천 그 역사 ‘복사골’의 유래부천을 상징하는 꽃은 복숭아나무의 꽃, 즉 복사꽃이다. 부천은 ‘복사꽃이 만발한 고을’이라 하여 복사골이라고도 불린다. 복사골, 느낌이 좋다. 1902년 부천 지역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복숭아 재배가 시작된 이래 부천의 복숭아는 ‘소사명산 소사복숭아’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재배 면적이 크게 늘면서 소사복숭아는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소사복숭아는 수원의 딸기, 안양의 포도와 함께 경기도 3대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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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 부천향토 역사 전문가)
2016.04.26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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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에서 제일 큰 하천, 굴포천(5) 조선 전기에 굴포천 개간 시작 조선 전기인 태종 17년(1417)부터 굴포천 개간이 진행되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서 전국의 수리시설(水利施設) 축조에 공을 세우는 등 농업전문가였던 우희열(禹希烈)이 앞장을 섰다.우희열(禹希烈)은 순전히 자기 돈을 들여 부천분지를 개간하겠다고 태종에게 청했다. 이에 태종은 부평부사였던 목진공(睦進恭)에게 부천분지를 개간할 수 있는 지 물어보게 되었다. 부평부사 목진공(睦進恭)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부평 관내 농민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니 다들 자신들이 힘들게 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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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3.2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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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리울내의 발원지는 식골(息谷)고리울내의 발원지는 봉배산 식골(息谷)이다. 은행단지에 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고리울내의 도랑을 이루었다. 비가 오지 않는 가을이나 겨울에는 물길이 생겨나지 않는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 봉배산에 비가 내리면 이 물이 식골에 모여 조그만 도랑을 이룬다. 장마철이나 폭우가 쏟아질 때는 도랑을 넘쳐흐른다. 이렇게 골짜기를 흐르는 것을 도랑이라고 한다. 도랑 양옆에 둑을 쌓아 놓으면 그게 봇도랑이 된다. 도랑에 대한 탯말은 함경북도에선 ‘도랑개와 도래’, 평안남도에선 ‘걸창’, 평안북도에선 ‘도랑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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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3.16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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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에서 부평 서운동으로 연결된 목숙교(苜蓿橋) 부천에서 제일 큰 하천, 굴포천(4) ◆ 굴포천 한다리, 대교 이야기 굴포천엔 김포에 있는 굴포교 이외에도 한다리인 대교(大橋)가 있었다. 대교는 부평도호부에서 한양으로 가는 아주 길목이었다. 이 대교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이 갈라졌다. 첫 번째 대로는 대교에서 대장마을을 거쳐 양화진으로 가는 길이었다. 양화진은 아주 큰 나루였다. 양화진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 북안에 있던 나루로 양화도(楊花渡)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강화(江華)로 가는 주요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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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3.10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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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름 중에서 최고는 똥! 몇 천년 동안, 아니 몇 만년 동안 똥은 늘 우리곁에 있었다. 똥이 없는 인생이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변기에 앉아 버튼만 누르면 물과 함께 사라지는 똥이지만 말이다. 그 똥이 귀하고 귀한 대접을 받던 시기가 불과 삼십년 전이다. 삼십년전부터 거꾸로 주욱 거슬러 올라가면 귀한 채소며 과일을 키워내는 거름이었다. 거름은 ‘걸다’에서 나온 말이다. 뭐가 걸까? 이 ‘걸다’는 ‘걸쭉하다, 푸짐하다’는 말과 같다. 뭐가 푸짐하고 걸쭉할까? 맑은 물이 아니라 물속에 무엇이 잔뜩 들어 있는 것을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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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2.24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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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선은 현재 부천역인 소사역에서 출발 부천에 철도 노선이 3개가 있었다. 지금도 운행되고 있는 경인전철이 그 하나이고, 소사역에서 김포공항까지 연결된 김포선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오류역에서 옥련마을에 있던 경기화학까지 연결된 경기화학선이다. 김포선의 출발지는 열차가 개통된 1951년 당시 소사역인 부천역 북부에서 서울 쪽으로 쭉 들어간 부분에서 시작한다. 경인선이 처음 생겼을 때 소사역의 사진을 보면 조그만 역사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다. 1919년도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를 보면 하우고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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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2.22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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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이규보의 망해지 부천의 유명 인물로는 단연 고려 이규보를 꼽는다. 이규보는 부천뿐만 아니라 부평, 계양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부천, 부평, 계양이 한 역사의 틀 안에 있었기에 그 역사의 뿌리도 같다. 이규보는 고려 고종 6년(1219년) 좌사간지제고(左司諫知制誥)라는 벼슬에서 계양도호부 부사(桂陽都護府 副使)로 좌천되어 13개월 남짓 머물렀다. 이 해에는 고려 무신정권의 최충헌이 죽고 그의 아들 최우가 권력을 잡은 해이기도 하다. 이규보는 ‘바다를 바라보는 기록이라는 망해지(望海誌)’라는 글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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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2.1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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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 수도길이 생기게 된 배경 부천에 수도길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독특한 이름이다. 부천에 조선시대의 옛길이 몇 개 있었지만 수도길은 그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때엔 수도길은 없었다. 마을마다 대동우물이 있기 때문에 수도관을 따로 묻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가 1905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며 실질적인 조선통치를 이어갔던 시기에 순전히 일본인들을 위한 수도길이 만들어졌다. 인천항이 제물포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이 조그만 항구를 개항한 해가 1883년이었다. 이 때의 제물포는 10여 개의 고기잡는 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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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2.1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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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포천으로 흘러드는 하천 지류들 부천에서 굴포천으로 흘러드는 지천은 고리울내, 베르내, 붕어내, 큰내, 구지내가 있었다. 모두 우리말로 표기했다. 이들 지천들은 베르내를 제외하고 모두 복개되어 지천으로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이 지천들에게서 쏟아져 내려온 물들이 모두 굴포천에 모여 굴포천의 수량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인천의 만월산, 천마산, 영성산, 계양산, 황어 부근까지 지천이 발달해 있었다. 고리울내는 봉배산 식골에서 발원해서 고강초등학교 앞을 거쳐 고리울 앞 들판을 휘돌아 오쇠리, 대장동으로 빠졌다. 하류로 가면서
내고향 부천이야기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2016.01.31 1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