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도착한 다음 날

네덜란드에 도착한 다음 날, 나와 엄마는 8시간의 시차 적응을 이기지 못하고 새벽 6시에 일어났다. 1층(사실 1층은 가게고 내가 1층이라 말하는 것은 2층이다.)으로 내려와 넓은 창문 아래로 네덜란드의 풍경을 보니 이제서야 내가 외국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아, 사실 아침의 풍경이라기보단 새벽의 풍경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네덜란드는 해가 되게 늦게 떠서 그 날도 8시가 돼서야 해를 볼 수 있었다. 별 것 아닌 집 앞의 풍경일 뿐이지만 들뜬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마 말하지 않으면 집 앞의 풍경이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외국에 처음 가본 나에겐 새로운 충격이었다.

엄마와 둘이서 설렘을 가득 안고 먹은 첫 끼는 빵과 잼. 호밀빵에 여러 가지 잼과 햄, 치즈를 넣고 먹는 간단한 식사였지만 뭘 해도 신날 때였다. 그렇게 일찍 일어나 네덜란드 아침의 여유를 한참 즐기고 슬슬 밖에 나갈 준비를 한다.

지금 나는 가만히 있다가도 ‘피식’, 창밖을 바라보다 ‘피식’, 예쁘게 머리를 땋다가 거울 속 행복해 보이는 나를 보곤 또 ‘피식’, 계속 웃게 된다. 양 갈래로 딴 머리에 어제 산 귀걸이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까치발을 들고 높은 거울 속 나를 간신히 들여다본다. 그리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가장 행복한 소녀가 된 듯 환하게 웃어 보인다. ‘기억해, 넌 이렇게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소녀야. 잊지 마, 누구도 너의 그 환한 웃음을 짓밟을 수 없어.’라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도 잊지 말자. 미래에 내가 아무도 믿지 못할 힘든 순간이 오면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보험이고 오늘의 나를 더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주문이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하다. 엄마와 선생님도 준비를 마쳤다. 다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집 밖을 나간다. 밖에는 미세먼지 하나 없는 선선한 공기와 영화로만 봤던 풍경들. 그리고 사람들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거리를 거닌다. 조금 걷다 보면 어제 내렸던 바로 그 버스 정류장이 있다. 요한에게 빌린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에 탔다.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라 잘 못 봤는데 여기 버스 정말 길다. 우리나라 버스의 약 2배 정도는 길어 보인다. 중간에 연결고리로 스프링(?) 같은 게 있었는데…. 내가 백 마디를 하는 것보다 직접 가서 보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 하지만 직접 본다면 내 설명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지 않을까? 그러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좀 거슬렸던 것은 카드를 찍을 때였다. 한국에서는 빨리 빨리라는 문화가 있어서 그런지 카드를 찍으면 바로 삑~~ 소리가 나는데 여긴 카드를 찍으면 (1초 쉬고) 삐~빅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계속 조급하게 살던 게 습관이 돼서 좀 답답했던 부분이었지만 여기 사람들은 조금 늦더라도 느긋하게 기다려줘서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저 한국에서만 살던 사람의 작은 불편함이랄까?

버스를 타고 내리면 바로 배를 타는 곳이 나오는데 텍셀은 섬이기 때문에 텍셀 안에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면 어딜 가든 배를 타야했다. 어릴 때 섬에 배를 타고 가다 멀미 한 기억 때문에 처음엔 좀 무서웠지만, 배가 워낙 컸고 이동 시간이 20분 정도를 넘기지 않고, 눈 감았다 뜨면 도착이라 나중엔 별생각도 안 들더라. 배에서 영혼 없이 앉아있다 내려서 버스를 타고 덴헬더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화려한 간판에 큰 차에서는 12월에만 파는 ‘올리볼렌’을 팔고 있었다. 큰 그림에 그려진 삽화는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올리볼렌 세 개를 시켰다. 찹쌀도너츠 정도 크기에 설탕을 묻혀 티슈에 싸 줬는데 식으면 맛없다는 소리에 얼른 입에 집어넣었다. 겉면은 튀겨서 바삭하고 안은 쫄깃한 빵이 가득 차 있다. 파는 곳마다 건포도를 넣거나 레몬을 잘라서 넣는 등 다양하지만 이곳은 빵에 아무것과 넣지 않은 기본형식이었다. 정말 간단해 보이지만 먹기 전까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 맛이다. 12월에는 4. 5월보다는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올리볼렌을 먹으러 또 12월에 오고 싶다.

거리를 걸으며 보니 길 양쪽으로 다양한 아이디어 샵들, 오래된 것들을 싸게 파는 골동품 가게 같은 것들이 쭉 있었다. 조그만 차 안에 차린 조그만 커피 가게에서는 엄마의 라떼와 내 에그타르트를 샀다. 사실 한국에서 먹던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맛이었지만 외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인다.

달달한 것을 입안 가득 베어 물고 기분 좋게 걷다 보니 어디선가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럿이서 연주하는 것 같던 소리는 큰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였고 그 외에 세 명 정도의 아저씨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호응을 유도하고 있었다. 대부분 그런 것들은 사진을 찍으면 돈을 줘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계속 걷다가 한 골동품 가게에 들어갔다. 그 골동품 가게에서 파는 빈티지한 느낌의 물건들은 엄마와 선생님의 취향을 저격하기에 너무 충분했지만, 아직 14살인 내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선생님은 마음의 드는 물건들을 골라 샀다. 엄마는 귀여운 초록색 우쿨렐레도 샀는데, 가게 앞에서 우쿨렐레와 찍으라기에 아무 생각 없이 찍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우쿨렐레가 내 것이었다. 어렸을 때 우쿨렐레를 배우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엄마가 우쿨렐레를 사준 것 같다. 내가 우쿨렐레를 치진 못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렇게 주변 가게들을 둘러보다 또 하루가 끝났다. 추가로 하나 더 말하자면 전날에는 몰랐는데 우리 방 천장에 있는 창문이 굉장히 무섭더라. 더 자세히 말하자면 창문이 닫혀있어도 숨구멍(?) 같은 게 있어서 창문 뒤로 보이는 마녀 나무 같은 게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들리는 바람 소리가 마치 귀신 소리처럼 “휘유유유융~ 퓌유유유융~.” 흔들리는 나무는 가지도 무섭게 생긴 게 잎도 없어서 생기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화난 것 같은 모양새가 아주 가관이다. 물론 이 소리도 며칠 적응하니 들리지도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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