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결국 그 날이 오고 말았다

이제는 이 여행도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 있다. 매일 아침 창밖에 풍경이 겨우 익숙해지려 하니 돌아가야 한단다. 아쉬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한국에 그리운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네덜란드를 뒤로하고 다시 돌아올 만큼 엄청난 것도 없다. 한 달 지낸 거로는 한국에 대해 그리움이 생기지는 않나 보다. 한 달 정도 더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시간은 왜 이리 또 부지런한지.

거부하려 해도 가까워지는 건 비행기 시간뿐이라 천천히 귀국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가까운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선물로 고르고 곧 돌아가야 할 일상에 대해서 친구들과 이야기 한다. 친구들은 나 없이 겪었던 짜증 나는 생활이 억울했는지 내가 다시 그 생활에 합류한다는 사실이 퍽 즐거운 모양이다.

마음은 분주하고 아쉬워도 늘어지는 내 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마치 어제 네덜란드에 도착한 것 마냥 여유로이 있다 보니 어느새 크리스마스 날이다. 한국에서는 이벤트 같은 공휴일이지만 유럽에서 크리스마스는 우리 명절만큼이나 중요한 행사이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요한과 선생님도 어제 요한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왔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간단히 밥을 먹고는 요한과 딸기치즈케이크를 만들었다. 오븐에 굽는 형식이 아니라 쉬웠지만 처음 만드는 치즈케이크라 신기하기도 했다. 치즈케이크를 냉장고에 얼리고 굳기를 기다리며 오늘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놀러 가기로 했다. 네덜란드는 땅이 낮고 평평해서 산이 없고 거의 다 들판인 것이 특징이다.

급하게 머리를 올려서 똥머리를 하고 나와 엄마, 요한과 선생님, 이렇게 넷이서 출발했다. 길을 모르는 우리는 요한의 뒤만 쫄래쫄래 쫓아갔는데 가다 보니 굉장히 예술적으로 디자인된 건물이 보였다. 색깔도 알록달록한 게 작은 전시관인가? 할 정도였다. 그런데 웬걸 그 화려한 건물이 동사무소라는 것이다. ‘동사무소? 이게 동사무소라고?’ 우리 집 근처에 회색빛 칙칙하던 동사무소랑 같은 일을 하는 곳이라니…. 이런 작은 차이들이 사회의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 새삼 실감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 드넓은 들판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도로에는 안 봐도 잘 먹고 큰 게 확실한 닭이 걸어 다니고 울타리 안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저 멀리서는 내 키에 세 배는 돼 보이는 말들도 보였다. 세상에나…. 마치 영화 속 풍경을 눈앞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인공적인 색깔 하나 없이 어쩜 이리 푸르고 예쁜지 한참을 구경한 것 같다.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엄청 근육이 빵빵한 검정 말을 타고 가는 사람도 둘이나 봤다.

그리곤 올라온 길을 따라 다시 집으로 갔는데 너무 정신없이 구경한 탓에 도대체 어디가 제일 높은 곳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언덕에 올라간 게 맞긴 하는가…? 그래도 어쨌든 내가 걸어온 길 중에 제일 높은 언덕이 있긴 있었을 테니까 상관없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는 치즈케이크에 블루베리를 올려 꾸미고 잘라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뭔가 푸딩 같은 식감이랄까? 딸기 요거트 같은 맛도 있는 것 같고…. 한국에선 먹어보지 못한 형식에 치즈케이크였던 것 같다.

그리곤 요한은 자고 나랑 엄마, 선생님 셋이서 넷플릭스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영화를 봤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시간을 보내기에는 꽤 괜찮은 영화였던 것 같다.

들판도 케잌도 영화도 너무 좋았지만, 이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저녁이다. 동그란 열판은 가운데 놓고 개인당 앞 접시와 미니 프라이팬을 하나씩 갖고서 양옆에 놓인 식재료를 미니 프라이팬에 구워 먹는 형식이었다. 그것도 버터에다가 말이다. 소고기부터 칵테일 새우, 양파, 소세지, 미니 돈까스까지 맛있는 게 너무 많았다. 난 그중에서 양파와 칵테일 새우가 가장 맛있었다. 해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어찌나 맛있던지 의도치 않게 그 날은 과식을 한 것 같다.

하나둘 짐을 정리하고 보니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자꾸만 실감이 난다. 돌아가면 더는 창문 밖 예쁜 풍경도, 키 큰 외국인들도, 동화 같은 분위기도 없다. 좀만 더 움직일 걸, 사진 좀 많이 찍을 걸, 더 많이 놀러 다닐 걸 하는 후회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하고 왱왱댄다.

그리고 결국 그 날이 오고 말았다. 한국에 한파 소식에 나는 멋 따윈 포기하고 최대한 따뜻하게 입었다. 직접 뜬 빨간 모자에 머스타드 색 목도리…. 마지막이니까 웃으며 사진을 찍었더니 이럴 수가 행복한 노숙자가 따로 없다.

마지막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이젠 놀러 가는 게 아닌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린다. 요한과 혜정쌤이 마지막 마중을 나와줬다. 나 혼자 눈물겨운 인사를 하고 100kg처럼 느껴지는 나의 캐리어를 들고 씁쓸하게 결국은 버스를 타고 말았다. ‘아.. 아까 버스 문 닫히기 전에 뛰어내렸어야 됐는데…. 그냥 지금이라도 내릴까? 배 타면 진짜 끝인데 어떡하지?’ 가기 싫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나는 어찌할 바가 없다.

‘아…. 집 가기 싫다’ 이 생각을 백 번쯤 하고 있을 때 난 이미 암스테르담으로 가고 있는 기차에 실려서 정신이 헤롱한 상태였다. 다시 정신 차려보니 이미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기 중이었고 결국 난 비행기 안에서 모든 희망을 잃었다. 하늘에 뜨는 순간 난 이제 더는 네덜란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서러웠다.

난 제정신이 아니었고 결국 비행기에서 핸드폰을 놓고 내리는 바람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엄마한테 혼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 난 결국 네덜란드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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